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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75주년] ㉖ 좌우대립 속 육사 3기생 적·동지로 갈려

등록 2020.06.28 06: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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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룡과 김지회가 함께 찍은 육사 졸업사진 최초 공개

소위 임관 직후부터 숙군 주도하며 승승장구한 김창룡

여순사건의 주동자가 된 여수 주둔 중대장 김지회


해방정국 3년의 역사적 경험은 오늘날 한반도가 당면한 문제를 풀어나가는데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해 준다. 과거의 실패를 성찰해야 현재의 과제를 파악할 수 있고, 미래를 내다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문제의식으로 광복 75주년을 맞아 새롭게 발굴된 사진과 문서를 중심으로 해방 직후 격동의 3년간을 매주 재조명해 본다. [편집자 주]

26. 육사 3기 졸업앨범

미군은 군정청을 설립한 지 두 달 정도 지난 뒤에 1945년 11월 3일 미군정청 내에 국방과 경비를 전담하는 기구로 국방사령부를 설치했다. 국방사령부는 1946년 3월 29일 미군정법령에 의거 국방부(DND: Department of National Defense)로 개칭됐다가 다시 ‘국방’이라는 용어를 삭제하고 국내경비부로 개칭하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 창군 주역들은 대한제국 시기 군제였던 통위영을 본떠 통위부(統衛府)라고 불렀다. 통위부장은 광복군 출신의 유동열이었다.

[서울=뉴시스] 1946년 6월 15일 당시 국방과 경비를 책임진 미군정 통위부(統衛府) 간부들이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앞줄 왼쪽 3번째부터 채원개, 원용덕, 이형근, 유동열, 송호성, 이응준, 정일권, 김일환, 최홍희, 뒷줄 왼쪽 1번째 김종평, 2번째 강영훈, 6번째 최경록, 최남근, 최영희, 최덕신, 김완룡, 김종오, 양국진, 이한림, 17번째 김익렬 등의 모습이 보인다. 이중 최남근은 1949년 국방경비법 위반으로 총살됐고, 유동열과 송호성은 전쟁 시기에, 최홍희와 최덕신은 그 후에 북으로 가 현재 북의 국립묘지인 애국열사릉과 재북 인사 묘에 묻혔다. (사진=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06.28. 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 1946년 6월 15일 당시 국방과 경비를 책임진 미군정 통위부(統衛府) 간부들이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앞줄 왼쪽 3번째부터 채원개, 원용덕, 이형근, 유동열, 송호성, 이응준, 정일권, 김일환, 최홍희, 뒷줄 왼쪽 1번째 김종평, 2번째 강영훈, 6번째 최경록, 최남근, 최영희, 최덕신, 김완룡, 김종오, 양국진, 이한림, 17번째 김익렬 등의 모습이 보인다. 이중 최남근은 1949년 국방경비법 위반으로 총살됐고, 유동열과 송호성은 전쟁 시기에, 최홍희와 최덕신은 그 후에 북으로 가 현재 북의 국립묘지인 애국열사릉과 재북 인사 묘에 묻혔다. (사진=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06.28. [email protected]


1946년 통위부 산하에 남조선국방경비대(南朝鮮國防警備隊)가 창설된 데 이어 5월 1일 88명을 제1기생으로 하여 정규 사관 교육을 지향하는 ‘남조선국방경비학교’가 태릉에서 개교했다. 이보다 3개월 정도 앞서 38선 이북에는 북한 최초의 군사정치학교인 평양학원이 문을 열었다. 남이나 북이나 군사 간부의 양성이 시급하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다.

남조선국방경비학교는 1948년 8월 대한민국 정부가 공식적으로 수립된 후 육군사관학교로 이름이 바뀌기 직전까지 제1기에서 제7기까지 약 1800여 명의 사관후보생들을 배출했고, 기별에 따라 최단 45일부터 최장 6개월 정도의 교육을 받은 후 임관됐다.

그중 육사 2기생은 박정희 대통령을 비롯해 6명의 대장, 8명의 장관을 배출해 한국 현대사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 이에 비해 1946년 11월 입교해 95일간의 훈련과정을 마치고 1947년 4월 19일 임관한 육사 3기생은 해방 직후의 좌우갈등과 숙군(肅軍)을 거치면서 가장 큰 상처를 남긴 기수였다.

특히 이들은 1948년 8월 정부 수립 전후에 발생한 ‘제주도 4.3사건’, ‘여수·순천 사건’에 직간접적으로 얽히면서 일부는 ‘주동자’로, 일부로 ‘진압군’으로 엇갈렸다. 육사 문을 나선 지 1년 남짓 사이에 한 내무반에서 생활을 같이해온 동기생끼리 적과 우군으로 나뉘어 혈전을 벌인 것이다.

육사 3기가 좌경화되고 숙군 대상자가 많았던 것에 대해 육사 3기 조혁환(曺赫煥) 예비역 장군은 “오일균 생도 대장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지. 당시 생도 대장은 ‘하늘’이었어. 일상 내무생활에서부터 임관까지 모든 결정권을 쥐고 있었거든. 물론 당시 교수부장 조병건 등도 상당한 역할을 했지”라고 증언한 바 있다.

[서울=뉴시스] 1947년 4월 29일 자로 발간된 육군사관학교(당시 남조선국방경비학교) 제3기 졸업앨범에 있는 실린 이영순 참모장과 주요 간부들의 모습. 이중 조병건 교수부장, 오일균 생도 대장, 김학림 제2중대장이 숙군 대상자가 됐다. (사진=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06.28. 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 1947년 4월 29일 자로 발간된 육군사관학교(당시 남조선국방경비학교) 제3기 졸업앨범에 있는 실린 이영순 참모장과 주요 간부들의 모습. 이중 조병건 교수부장, 오일균 생도 대장, 김학림 제2중대장이 숙군 대상자가 됐다. (사진=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06.28. [email protected]

[서울=뉴시스] 1947년 4월 29일 자로 발간된 육군사관학교(당시 남조선국방경비학교) 제3기 졸업앨범에 있는 실린 제1중대 제1구대 졸업생 51명의 모습. (사진=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06.28. 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 1947년 4월 29일 자로 발간된 육군사관학교(당시 남조선국방경비학교) 제3기 졸업앨범에 있는 실린 제1중대 제1구대 졸업생 51명의 모습. (사진=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06.28. [email protected]


1948년 4월 3일 제주도에서 350명의 무장대가 봉기해 도내 24개 경찰지서 가운데 12개 지서를 일제히 공격했다. ‘제주 4.3사건’의 시발점이었다.

당시 제주도에는 국방경비대 제9연대가 진주했었다. 당시 육사 3기 중에서는 문상길 중위와 이윤락 중위가 중대장으로 있었다. 육사 시절 문상길과 같은 구대에 소속돼 있던 최세인도 인사 주임으로 부임했다.

문상길은 임관 후 1946년 11월 제주도 모슬포에서 제9연대가 창설되자 이곳으로 자리를 옮겨 모병 책임자가 됐다. 동기인 이윤락도 9연대 정보 주임으로 합류했다.

4·3사건이 발생했을 때 연대장은 김익렬 중령이었고, 대대장은 육사 시절 생도 대장이었던 오일균 소령이었다. 김익렬은 4·3 봉기 후 조직된 유격대(인민해방군) 사령관 김달삼과 학병(學兵) 동기였고, 오일균과 문상길, 이윤길은 남로당과 연결돼 있었다. 오일균과 문상길은 9연대가 가지고 있던 무기들을 유격대에 빼돌렸고, 토벌보다는 유격대 쪽과의 협상을 유도했다.

무장봉기가 처음 일어났을 때 제9연대는 이 사건을 도민과 경찰 간의 충돌로 간주했다. 서울에 있는 경비대 수뇌부에서도 제주도 사건을 치안 상황으로 보고, 그 진압은 경찰이 할 일이지 군이 개입할 성질이 아니라는 입장을 보였다.

4월 28일 김익렬 연대장과 무장대 사령관 김달삼 간의 평화협상은 이런 과정을 겪으며 추진되었다. 제주읍에서 열린 김익렬과 김달삼의 회담에는 정보 주임 이윤락 중위도 배석했다.

그러나 5월 연대장이 김익렬에서 박진경 대령으로 교체되면서 군의 진압 작전이 본격적으로 시행됐다. 9연대가 제11연대로 개편된 뒤 연대장으로 부임한 박진경 대령은 “제주도 폭동 사건을 진압하기 위해선 제주도민 30만을 희생시키더라도 무방하다”고 주장할 정도로 강경 진압을 폈다.

박진경 대령의 진압 작전에 불만을 품은 문상길은 6월 18일 부하들에게 지시해 그를 암살했다. 초기 무장봉기에 반대 입장을 보였던 문상길은 대화로 사태를 수습하려고 했지만, 군의 작전이 선무(宣撫)에서 진압으로 바뀌자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것이다.

[서울=뉴시스] 1947년 4월 29일 자로 발간된 육군사관학교(당시 남조선국방경비학교) 제3기 졸업앨범에 실린 2중대 제4구대 문상길(앞줄 오른쪽에서 3번째)과 최세인(앞줄 왼쪽에서 4번째) 1년 뒤 제주 4·3 사건이 발생하자 문상길은 새로 부임한 박진경 조선국방경비대 제11연대 연대장을 살해했고, 최세인(후에 1군사령관, 대장 예편)은 진압군인 제11연대의 인사 주임으로 활동했다. (사진=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06.28. 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 1947년 4월 29일 자로 발간된 육군사관학교(당시 남조선국방경비학교) 제3기 졸업앨범에 실린 2중대 제4구대 문상길(앞줄 오른쪽에서 3번째)과 최세인(앞줄 왼쪽에서 4번째) 1년 뒤 제주 4·3 사건이 발생하자 문상길은 새로 부임한 박진경 조선국방경비대 제11연대 연대장을 살해했고, 최세인(후에 1군사령관, 대장 예편)은 진압군인 제11연대의 인사 주임으로 활동했다. (사진=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06.28. [email protected]


문상길은 체포돼 고등군법회의에서 총살형을 선고받고 9월 23일 경기도 수색 기지에서 총살됐다. 당시 스물세 살이었다. 그의 총살형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제1호 사형 집행이었다.

대대장이었던 오일균은 제주도 포로수용소 소장으로 전보됐다가 체포돼 1949년 2월 고등군법회의에서 최남근 중령, 김종석 중령, 조병건 소령 등과 함께 총살형을 선고받고 총살됐다.

반면 진압 작전에 투입됐던 최세인 중위는 이후 1야전군사령관으로 승진해 노재현 전 육군참모총장, 박희동 3야전군사령관과 함께 육사 3기가 배출한 3명의 대장 중 한 명이 됐다.

제주 4·3 사건이 수습되지 않은 가운데 10월 19일에는 제주도 출병을 앞둔 여수 주둔 국방경비대 제14연대의 일부 군인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14연대는 현지 모집과 광주 4연대에서 차출된 병력 800여 명으로 창설된 지 5개월 정도밖에 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서울=뉴시스] ‘국군 제14 연재 반란’을 보도한 <동광신문> 1948년 10월 21자 호외. (사진=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06.28. 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 ‘국군 제14 연재 반란’을 보도한 <동광신문> 1948년 10월 21자 호외. (사진=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06.28. [email protected]


당시 연대장은 오동기 소령이었고, 육사 3기생 중 김지회는 여수 주둔 중대장, 홍순석은 순천 주둔 중대장으로 있었다. 여순사건이 발발하면서 두 사람은 주도자로 부상됐고, 진압된 후에도 지리산으로 들어가 유격 활동을 이어가다 1949년 4월 지리산에서 토벌군에 의해 사살됐다.

[서울=뉴시스] 1947년 4월 29일 자로 발간된 육군사관학교(당시 남조선국방경비학교) 제3기 졸업앨범에 실린 제2중대 제5구대의 오동기(앞줄 오른쪽 3번째)와 김병삼(뒷줄 왼쪽에서 2번째). 오동기는 1948년 여순사건이 발생했을 때 ‘반란’을 주도한 제14연대의 연대장이었고, 그해 10월 ‘혁명의용군사건’으로 구속됐다. 김병삼은 후에 헌병사령관을 거쳐 5·16 군사 쿠데타 후 국가재건최고회의 초대 내각 사무처장을 지냈고, 소장으로 예편해 1960년대에 체신부 장관을 지냈다. (사진=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06.28. 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 1947년 4월 29일 자로 발간된 육군사관학교(당시 남조선국방경비학교) 제3기 졸업앨범에 실린 제2중대 제5구대의 오동기(앞줄 오른쪽 3번째)와 김병삼(뒷줄 왼쪽에서 2번째). 오동기는 1948년 여순사건이 발생했을 때 ‘반란’을 주도한 제14연대의 연대장이었고, 그해 10월 ‘혁명의용군사건’으로 구속됐다. 김병삼은 후에 헌병사령관을 거쳐 5·16 군사 쿠데타 후 국가재건최고회의 초대 내각 사무처장을 지냈고, 소장으로 예편해 1960년대에 체신부 장관을 지냈다. (사진=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06.28. [email protected]

[서울=뉴시스] 1947년 4월 29일 자로 발간된 육군사관학교(당시 남조선국방경비학교) 제3기 졸업앨범에 실린 최덕신(앞줄 오른쪽에서 3번째)과 홍순석(뒷줄 오른쪽 1번째). 두 사람은 제2중대 제6구대였다. (사진=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06.28. 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 1947년 4월 29일 자로 발간된 육군사관학교(당시 남조선국방경비학교) 제3기 졸업앨범에 실린 최덕신(앞줄 오른쪽에서 3번째)과 홍순석(뒷줄 오른쪽 1번째). 두 사람은 제2중대 제6구대였다. (사진=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06.28. [email protected]


여순사건 진압과정에서 육사 3기생의 행적은 엇갈렸다. 송호림 중위(중장 예편)는 토벌군의 선봉으로 순천시에 들어가는 등 진압 작전에서 큰 전과를 올렸지만, 김응록 중위는 ‘반란군’에 동조하고 토벌에 소극적이었다는 이유로 숙군 대상자가 돼 1949년 총살됐다.

여순사건은 군내 좌익혐의자 숙군작업을 본격화하는 신호탄이 됐고, 실무책임자는 역시 육사 3기생인 김창룡이었다. 그는 육사 생도 시절 김지회와 같은 구대에 소속돼 있었고, “생도의 80%가 공산주의자”라고 판단할 정도로 반공주의자였다. 소위로 임관한 뒤 제1연대 정보부에 배치되자 그는 “하늘이 도와 나를 제1연대 정보부에 근무하게 하였다”라고 기록했다.

[서울=뉴시스] 1947년 4월 29일 자로 발간된 육군사관학교(당시 남조선국방경비학교) 제3기 졸업앨범에 있는 실린 제1중대 제1구대 소속 졸업생 김창룡(앞줄 왼쪽에서 2번째)과 김지회(뒷줄 왼쪽에서 6번째) 1년 뒤 김창룡은 숙군의 실무책임자로, 김지회는 여수·순천 사건의 지휘자가 된다. (사진=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06.28. 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 1947년 4월 29일 자로 발간된 육군사관학교(당시 남조선국방경비학교) 제3기 졸업앨범에 있는 실린 제1중대 제1구대 소속 졸업생 김창룡(앞줄 왼쪽에서 2번째)과 김지회(뒷줄 왼쪽에서 6번째) 1년 뒤 김창룡은 숙군의 실무책임자로, 김지회는 여수·순천 사건의 지휘자가 된다. (사진=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06.28. [email protected]


그는 소위로 임관한 지 한 달밖에 안 된 시점에 연대장 부임을 앞둔 이병주 소령을 좌익혐의로 체포했고, 국방경비대 제1연대 정보 주임의 보좌관, 방첩부대의 전신인 정보국 3과(SIS: 특별조사과)에서 활동하면서 군내 숙군작업을 실무적으로 주도했다.

김창룡의 숙군작업을 주도할 수 있었던 것은 통위부 고문관 가소(Kasso) 소령의 후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공군참모총장과 국방부 장관을 역임한 김정렬(金貞烈) 장군의 회고에 따르면 김창룡은 숙군을 실시할 때, “웬만한 사람의 키를 넘을 만큼 어마어마하게 큰 도표에 남로당 수뇌부를 정점으로 하여 밑으로 피라미드 모양으로 퍼져나간 남로당 군사조직 표를 그려놓고 수사를 진행했다”라고 한다.

[서울=뉴시스] 1947년 4월 29일 자로 발간된 육군사관학교(당시 남조선국방경비학교) 제3기 졸업앨범에 나란히 실린 제1중대 김동빈 중위와 제2중대장 김학림 중위. 둘의 운명은 엇갈려 김동빈 중대장은 이후 중장으로 승진해 예편했으나, 제2중대장 김학림은 숙군에 걸려 총살됐다. (사진=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06.28. 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 1947년 4월 29일 자로 발간된 육군사관학교(당시 남조선국방경비학교) 제3기 졸업앨범에 나란히 실린 제1중대 김동빈 중위와 제2중대장 김학림 중위. 둘의 운명은 엇갈려 김동빈 중대장은 이후 중장으로 승진해 예편했으나, 제2중대장 김학림은 숙군에 걸려 총살됐다. (사진=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06.28. [email protected]


김창룡은 숙군에 처음부터 끝까지 참여했던 유일한 인물이었고, 숙군을 통해 승승장구했다. 여순사건 당시 대위였던 김창룡은 1949년 1월 15일 소령으로 진급하고, 이로부터 6개월 뒤인 7월 15일 중령으로 특진했다. 그리고 1950년 1월 21일 대령으로 진급한 데 이어 1951년 육군 특무부대장에 취임했다.

그러나 김창룡의 수사 과정에 대해서는 무리한 수사로 억울한 피해자를 양산했다는 비판도 제기됐다. 실제로 좌익혐의자로 체포돼 1949년 2월 고등군사재판에 부쳐진 육사 3기생 박상순, 한동석, 서정학 중위는 무죄를 선고받았다. 박상순은 김창룡과 함께 통위부 정보과에서 활동했지만 숙군 대상이 돼 자칫 억울한 희생자가 될 뻔했다. 후에 서정학은 육군 준장으로 승진한 후 예편했다.

[서울=뉴시스] 1947년 4월 29일 자로 발간된 육군사관학교(당시 남조선국방경비학교) 제3기 졸업앨범에 실린 제1중대 제3구대 소속의 김일수(金一洙, 뒷줄 왼쪽에서 5번째)는 1949년 11월 동료 장교 4명과 함께 파면되고 마포형무소에 수감됐다 공주형무소로 이감된 후 6·25전쟁이 터진 뒤 1950년 7월 9일 공주군 왕촌 살구쟁이로 끌려가 학살됐다. 당시 스물일곱이었다. (사진=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06.28. 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 1947년 4월 29일 자로 발간된 육군사관학교(당시 남조선국방경비학교) 제3기 졸업앨범에 실린 제1중대 제3구대 소속의 김일수(金一洙, 뒷줄 왼쪽에서 5번째)는 1949년 11월 동료 장교 4명과 함께 파면되고 마포형무소에 수감됐다 공주형무소로 이감된 후 6·25전쟁이 터진 뒤 1950년 7월 9일 공주군 왕촌 살구쟁이로 끌려가 학살됐다. 당시 스물일곱이었다. (사진=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06.28. [email protected]


특히 육사 3기생 김일수(金一洙)는 숙군대상자가 돼 파면된 후 형무소에 수감돼 있다가 전쟁이 터졌고, 1950년 7월 9일 공주형무소의 수감자들이 학살될 때 함께 죽었다.

전쟁 중 발생한 집단학살의 희생양이 된 것이다. 더욱 비극적인 일은 전남 장성에 거주하던 김일수 부친과 동생은 군인 가족이라는 이유로 학살된 것이다. 형은 ‘빨갱이 군인’으로 몰려 죽고, 동생은 ‘국군 가족’이라는 이유로 죽은 역설적인 상황이 벌어진 셈이다.

육사 3기 졸업앨범에 사진이 있는 졸업생은 총 302명으로 그중 60명 정도가 총살, 사살, 파면 등으로 최후를 맞이하거나 숙군됐다.


정창현 평화경제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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