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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이름 바꾼지 20년, 장희수 "거울 앞에 선 영원한 소쩍새"

등록 2020.09.02 10:5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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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예계도 코로나19 직격탄, 시청자들에 희망과 용기 주고파

쏜살같이 지나간 40년 무대 인생, 아직도 마음은 청춘

"이순재·나문희 선생님처럼 오래도록 활동할 터"

[인터뷰]이름 바꾼지 20년, 장희수 "거울 앞에 선 영원한 소쩍새"



[수원=뉴시스]이준구 기자 = "코로나19의 세찬 바람이 연예계로도 들이닥쳐 힘들기는 마찬가지지만 그래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국민들에게 연기로 용기와 즐거움을 드리고 싶습니다."

1981년 미스롯데 5기로 뽑힌 뒤 그해 KBS 공채 8기 탤런트로 연예계에 데뷔한 배우 장희수(57)는 올해로 연기생활 40년째다. 2000년 '장순천'에서 '장희수'로 이름을 바꾸고 활동한 지는 꼭 20년이다.

그동안 100편 이상의 TV드라마, 영화, 연극에 출연하고 라디오 프로그램을 진행하며 주목받아 왔다. 그리고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신중년으로 완숙한 연기의 경지를 선보이고 있다.

코로나19 장기화로 올해 초부터 연예계에도 찬바람이 엄습했다. 비대면 시대가 도래하면서 연극 무대마저 얼어붙었다. 코로나 직격탄으로 배우들은 설 자리를 빼앗기다시피 했다.

이 와중에도 장씨는 JTBC 미스터리 드라마'우아한 친구들'에서 대형병원 의료법인의 이사장 역을 맡아 남자처럼 터프한 이혼녀 캐릭터를 소화해 냈다. 게다가 최근 TV홈쇼핑 프로그램에 모델로 출연하기까지 했으니 매사 감사할 따름이다.

25년 전 이혼의 아픔을 겪었다. 서너살배기 남매를 등에 업고 나와 손이 부르터가며 살림을 했다. '여자는 약하나 어머니는 강하다'는 셰익스피어의 말 그대로 억척같이 살아 왔다. 오로지 아이들 만 떠올리며 일을 하고 파김치가 된 채 돌아오는 딸을 안쓰러워하며 '그러다가 쓰러지면 어떡하냐, 몸 좀 돌봐라'던 그녀의 어머니는 지난해 하늘나라로 떠났다. 힘들 때 의지할 사람은 엄마뿐이었다. 나이 먹었어도 고아다. 혼자라는 생각에 가슴이 먹먹하기만한 요즘이다.

군대를 다녀온 아들(26)은 내년이면 일본 도쿄의 명문 호세이대학을 졸업한다. 여름방학을 마친 연년생 딸은 곧 다시 영국으로 간다. 자녀 둘을 모두 유학시킨다? 강해도 보통 강한게 아닌 어머니, 장희수다.

 장씨의 꿈도 외교관이었다. 학창시절 아버지가 쓰러지면서 이루지 못한 슬픈 꿈이다. 그래서 더 아이들의 선택을 존중했다. 엄마가 해 내야 할 몫으로 여기고 어떻게든 공부를 시키겠다며 이를 악물고 있다.


'장순천'이라는 이름으로 활약한 20대 시절

'장순천'이라는 이름으로 활약한 20대 시절


4년 전 아들이 유학을 가기 전 육군사관학교로 데리고 갔다. 초대 육사 교장과 합참의장을 지낸 애들 할아버지를 보여주며 뿌리를 잊지 말라고 주입하고 싶었다. 육사기념관에 전시된 할아버지의 지휘봉과 나라를 지키는 기개가 풍겨나오는 사진들을 마주한 손자는 긍지 넘치는 청년이 됐다.

 장씨는 'TV손자병법', '해를 품은 달', '대추나무 사랑걸렸네' 등 숱한 인기드라마에서 활약했다. 1986년 MC 허참과 함께 KBS라디오 '한낮의 공개쇼'와 1992년 '즐거운 저녁길', 뽀빠이 이상용과는 '위문열차'와 교양 프로그램 등을 진행했다. 장씨를 아나운서로 착각하는 이들이 적지 않은 이유다.

하지만 그녀는 뼛속부터 연기자다. 만능엔터테이너로 분류되기는 하나 최종 목적지는 연기다.

 "이순재·나문희 선생님처럼 저도 오래오래 하고 싶습니다. 연기자가 되는 걸 극구 반대한 아버지, 옆에서 묵묵히 응원해준 어머니, 그리고 남은 두 남매를 위한 길이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거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연예계도 치열한 생존경쟁에 예외가 아니다. 성공한 사람들의 삶에도 굴곡이 있듯이 배우들에게도 무대의 화려함 뒤에 어두움이 있게 마련"이라는 자세다. 결국 스스로와 처절하고도 고독한 싸움에 임할 수밖에 없는 배우의 숙명을 그녀는 이렇게 수용한다.

 다시, 미당(未堂) 서정주의 '국화 옆에서'다.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서기까지 장희수는 소쩍새처럼 봄부터, 천둥과 먹구름 속에, 무서리를 참으며 울었다. 자기 얘기 같다. 앞으로도 이 시를 읊으며 소쩍새처럼 울겠다는 각오다.

"저를 비롯한 많은 선후배 연기자들도 코로나를 비껴갈 수 없는 어려운 상황입니다. 확진자가 계속 나오고, 무대가 없어져 생활고에 시달리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어떤 연예인은 SNS에 '올해는 세금 낼 게 한푼도 없다'는 자조섞인 이야기도 합니다"며 사업자등록이 없는 자영업자인 문화예술인을 위한 신용재단이나 신용협동조합 설립도 검토해야 한다고 짚는다.

1984년 대한민국연극제 대상 수상자이기도 한 장희수는 "코로나로 우리나라는 물론 전 세계가 어렵다. 어려울 때마다 국민들이 힘을 합쳐 위기를 극복했다. 특히 문화예술의 힘도 크다고 생각한다. 이럴 때일수록 국민들이 저희를 아껴주신다면 문화예술인들도 작은 힘이나마 보탤 것"이라며 환하게 웃었다.

[인터뷰]이름 바꾼지 20년, 장희수 "거울 앞에 선 영원한 소쩍새"




◎공감언론 뉴시스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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