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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희 타계]1969년 36명으로 시작한 삼성전자 수원공장

등록 2020.10.26 18:2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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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무대에선 다소 뒤쳐진다던 삼성전자에 올인

1989년 회장 취임 이후 세계 초일류 기업으로 키워

【수원=뉴시스】 수원 삼성전자 전경. (사진=수원시)

【수원=뉴시스】 수원 삼성전자 전경. (사진=수원시)

【수원=뉴시스】박상욱 박종대 안형철 기자 = 삼성은 경기지역 경제와 산업 전반에 미친 영향력은 실로 어마어마했다. 삼성전자와 반도체공장은 경기남부권 경제와 산업을 성장시키는 촉매제가 돼서 지역 부흥을 이끌었다.

이건희 회장은 1987년 12월 삼성그룹 총수 자리에 오른 후 반도체 사업 등을 잇달아 성공시키며 글로벌 무대에선 다소 뒤쳐지던 삼성전자를 명실상부한 세계 초일류 기업으로 키워냈다.

삼성 이전과 그 이후의 지역으로 구분할 수 있을 만큼 삼성이 들어오면서 따라오는 지역 상권 부활 및 배후도시 개발 등 부수적 효과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컸다.

바로 첫 수혜지가 수원이다. 삼성전자는 1969년 수원에 라디오와 TV 생산라인을 세우면서부터 그 출발을 시작했다. 설립 당시 인력이 36명에 불과했지만 창립 51년 사이 900배 이상 성장해 2018년 기준 총 면적이 172만㎡(52만 평)으로, 축구장 250개를 모아놓은 면적과도 같다.

1960년대 말 전자사업에 뛰어든 삼성전자는 수원에 대지 12만2000㎡(3만7000여 평) 규모의 사업장을 마련했다. 당초 삼성은 삼성전자 최초의 공장부지는 부산과 수원, 울주, 양산지역을 대상으로 조사를 벌였다고 한다.

이 중 서울과의 이동에 편리한 지리적 이점이 있으면서 물류 확보가 용이한 수원에 1968년 45만평 부지를 확보하고 다음해인 1969년 1월 13일 설립등기를 마쳤다.
【수원=뉴시스】 2004년 이건희 회장 반도체 방문 사진. (사진=삼성전자)

【수원=뉴시스】 2004년 이건희 회장 반도체 방문 사진. (사진=삼성전자)

1980년대 들어서는 기술 중심 회사로 도약하기 위해 본격적으로 R&D 투자에 나섰다. 1980년 390명, 1988년에는 1500명을 각각 수용하는 R&D 연구소를 잇따라 건립했다.

삼성전자 발전에는 일류 제품을 향한 이 회장의 집념도 한몫을 했다. 1995년 수원공장을 방문한 이 회장이 2000여 명의 임직원이 지켜보는 가운데 불량 휴대전화기와 무선전화기 150억 원 어치를 불 태웠던 일화는 유명하다.

생산단지에서 R&D 중심 연구단지로의 변신은 2000년대 들어 더욱 가속화됐다. 2001년 삼성 디지털시티에 지상 27층, 수용인원 6000명 규모의 정보통신연구소(R3)를 세우면서 ‘휴대폰 세계화’를 위한 전초기지를 마련했다. 4년 뒤인 2005년에는 TV를 비롯한 영상디스플레이 사업 일류화의 일환으로 지상 37층에 9000명을 수용하는 디지털연구소(R4)를 건립했다.

이어 2013년, 지상 27층의 2개 동, 1만여 명을 수용하는 모바일연구소(R5)를 완공함으로써 삼성디지털시티는 연구개발(R&D) 중심의 체계로 전환됐다.

국내 최대 연구단지로 거듭난 삼성디지털시티에는 예전에 있던 생산라인이 대부분 이전되면서 현재 제조인력 비중은 약 1%에 불과하다. 이처럼 생산라인을 대부분 철수한 삼성 디지털시티의 고용은 설립 당시 100명에도 미치지 못 했지만, 2000년 약 1만1000명, 2005년 2만1000명, 2010년 2만8000명, 2017년 말에는 약 3만4000명 수준까지 늘었다.

염태영 수원시장도 지난 25일 자신의 페이스북 계정에 "한국 경제계에 큰 족적을 남기신, 고(故) 이건희 회장님의 명복을 빈다"며 "고 이건희 회장은 ‘부인과 자식 빼고는 다 바꾸자’며 삼성의 글로벌 경영을 앞장서 이끌었다"며 고인의 생전 활동을 회상했다.


◎공감언론 뉴시스 [email protected], [email protected],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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