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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대학 구조 조정 다룬 연극 '누란누란'

등록 2021.01.25 17:06:47수정 2021.01.26 18:4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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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 연극 '누란누란'. 2021.01.25. (사진 =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제공) 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 연극 '누란누란'. 2021.01.25. (사진 =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제공) [email protected]

[서울=뉴시스]이재훈 기자 = 최근 대학로 아르코예술극장 소극장에서 개막한 극단 산수유의 연극 '누란누란'은 대학 구조조정을 다룬다.

자칫 우리 일상과 먼 일처럼 보이거나, 닳고 닳은 이야기처럼 여겨질 수 있다. 하지만 연극은 이 문제가 우리사회에서 예외적인 사건이 아니라, 상징적인 사건임을 돌아보게 만든다.

교통은 다소 불편하지만, 쾌적한 캠퍼스를 보유한 어느 지역의 대학. 이 대학을 인수한 기업의 재단과 대학본부는 '문과대학 구조조정'을 시도한다. 학교 발전을 명분 삼아 문과대에 속한 일곱 개의 학과들을 글로벌학부 하나로 뭉뚱그리려고 한다. 국문, 영문, 불문, 독문, 역사, 심리, 철학 이른바 '굶는 과'라는 사회적 편견에 휩싸여 있는 학과들이다.

작품 속에서 상아탑을 포기하고 이윤과 효율을 추구하는 대학의 모습은 마냥 낯설지 않다. 이 모습은 이미 다른 형태로 우리 사회에도 일상화돼 있기 때문이다.

교육과 논문에서 성과를 내기보다 재단 직속 기관에서 눈에 띄는 구조조정 성과를 내려는 교수, 적당히 정의로운 척 묻어가려는 교수, 학연 등 인맥에 매달리는 교수 등 정치적 이해관계에만 골몰하는 못난 인간 군상은 일부 대학 안에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공동체라면 어느 곳에서나, 쉽게 발견할 수 있는 우리네 모습들이다. 연극 속 대학의 모습은 우리 사회의 축소판인 셈이다. 교수에 임용되기 위해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는 시간강사, 신념을 굽히지 않기 위해 대학을 떠나려 노력하지만 이마저도 쉽지 않은 교수의 모습은 회사원과 다를 바 없다.

무엇보다 연극은 보통 우리가 교수라는 직업에서 기대하는 냉철하고 지적인 모습을 배반하며, 쾌감과 흥미를 안긴다. 교수들은 자신들의 의견이 관철되지 않거나 감정이 상하면, 멱살을 잡는 건 예사고 난투극도 서슴지 않는다.

본인이 인문대 교수인 홍창수 작가는 꼼꼼한 취재를 바탕으로, 실감나는 현장 스펙터클을 구현해낸다. 후반부에 논문 표절, 총장 직선제와 임명제의 득실 등을 놓고 벌이는 아귀다툼은 흥미진진하다. 꼼꼼한 현실의 반영이 어떻게 연극의 지평을 확장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110분의 러닝타임이 훌쩍 지나간다.

산수유의 류주연 연출도 돋보인다. 벤치 2개와 간이 의자 몇 개만 놓인 무대 위에서 대학의 여러 풍경을 만들어낸다.

[서울=뉴시스] 연극 '누란누란'. 2021.01.25. (사진 =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제공) 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 연극 '누란누란'. 2021.01.25. (사진 =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제공) [email protected]

무대가 한 가운데 있고, 그 무대의 4면을 객석이 둘러싼다. 4곳의 통로에서 들락날락거리는 인물들의 적절한 동선 배치로 갈등을 증폭시키는 힘이 대단하다.

투쟁적인 성격 탓에 '선다르크'라 불리는 심리학과 선 교수 역의 우미화를 비롯 최승일, 홍성춘, 김용준 등 중장년 배우들의 쫀쫀한 연기 합도 일품이다. 

극의 막바지, 바둑을 두는 교수들은 갖은 소동 이후에도 평화로워보인다. 하지만, 끝이 아니다. 교수협의회를 무력화시켰던 학교 재단은 교수 휴게실마저 철거하기로 결정한다. 그곳에는 대형 프랜차이즈 커피점이 들어설 예정이다. 대학의 자본화, 물질화는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공연 중간부터 통로마다 등장하는 이동형 비계(건물 공사장에 임시 가설하는 작업 발판)가 무대를 가득 채우며 극이 끝나는데, 이보다 현실적이고 삭막한 비유는 없다.

연극 제목의 누란(累卵)은 '층층이 알을 쌓아 놓은 모양처럼 위태로운 상황'을 가리킨다. 누란을 반복하는 연극 제목 '누란누란'은 그 아슬아슬한 형상을 더욱 강조한다.

사회 문제를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체험의 영역으로 확장한 보기 드문 수작이다. 우리사회의 누란지세(累卵之勢·포개어 놓은 알의 형세)가 겹쳐보인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위원장 박종관) 주최·주관의 우수 창작 레퍼토리 발굴을 위한 대표 지원사업 '2020 공연예술창작산실 - 올해의신작' 선정작 중 하나다. 오는 31일까지.


◎공감언론 뉴시스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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