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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빚도 탕감'…끝이 없는 선심성 금융정책

등록 2021.05.18 05: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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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 정옥주 기자 = 하루가 멀다하고 쏟아지는 포퓰리즘성 정책들에 금융사들이 골머리를 앓고 있다. 금융사들의 건전성이 저해될 가능성도 문제지만, 무엇보다 모럴해저드(도덕적 해이)가 확산될 수 있다는 우려가 높아지고 있다.

18일 금융위원회에 따르면 정부는 올 하반기부터 민간 금융회사가 보유한 장기소액연체채권에 대한 소각 조치를 순차적으로 시행한다. 이는 지난 2017년 11월 발표한 '장기소액연체자 지원대책'에 따른 후속조치로, 해당 채권 규모는 350억원(9000명)으로 추산된다.

장기소액연체자 지원대책은 국민행복기금 등(한마음금융·희망모아)이 보유한 장기소액연체채권에 대해 심사해 상환능력이 없는 경우 추심을 중단하고, 지속적으로 재산을 확인해 상환능력이 여전히 없다고 판단된 채무자에 한해 3년 후 해당채권을 소각하는 것을 말한다.

전날 금융위 발표에 따르면 원금 1000만원 이하 생계형 소액채무를 10년 이상 상환 완료하지 못한 장기소액연체자는 40만3000명으로, 이중 상환능력이 없다고 판단된 33만5000명(1조6000억원)에 대한 추심이 중단됐다. 이중 시효완성 채권 등 17만3000명(9000억원)에 대한 장기소액연체채권이 소각됐고, 나머지 16만2000명(7000억원) 중 11만8000명(6000억원)의 채권도 이번에 소각키로 했다. 이렇게 되면 빚을 탕감 받은 채무자 수는 29만1000명(1조5000억원)으로 늘어나게 된다.

또 이번 소각대상에서 제외된 나머지 채권(4만4000명·1000억원)도 최종적인 상환능력 심사를 거쳐 상환능력이 없는 경우 연말에 소각할 예정이다.

뿐만 아니라 정부는 국민행복기금이 아닌 일반금융회사가 보유한 장기소액연체채권도 올 하반기부터 소각할 계획이다.

정부는 지난 2018년 2월~2019년 2월 본인신청을 받아 장기소액연체자지원재단에서 상환능력이 없다고 판단된 경우 채권을 매입해 추심을 중단해 왔는데, 중단 3년이 지나는 올 하반기부터 이들 채권에 대해서도 소각조치를 시행한다는 것이다. 해당 채무자는 9000명, 채권 금액은 350억원으로 추산된다.

금융당국은 상환능력이 없는 장기소액연체자들이 차지하는 비중이 전체 가계대출 차주의 1.7% 정도로 규모가 작고, 사실상 회수 불가능한 채권을 포기하는 것이기 때문에 금융사들에 별 다른 부담이 되지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

특히 상환능력이 없어 어쩔 수 없이 생계형 소액자금을 장기 연체한 채무자들이 '빚의 굴레'에서 벗어나 경제적으로 재기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은 불가피하다는 입장이다. 또 지원대상자를 생계형 소액·장기연체자로 제한하고 공신력 있는 자료로 면밀히 상환능력을 심사하는 등 도덕적 해이 논란을 최소화하겠단 방침이다.

하지만 민간의 채무까지 정부가 개입하는 것이 과연 적절한 지에 대한 논란은 사그라들지 않고 있다. 무엇보다 금융사들은 단순히 금액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소액은 안 갚아도 된다는 인식이 확산되는 등 금융질서가 무너지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을 우려하고 있다.

한 은행 관계자는 "도저히 갚을 능력이 없는 이들이 정상적으로 금융활동을 할 수 있도록 재기의 발판을 마련해 줘야 한다는 취지에 대해서는 공감한다"며 "그러나 아무리 상황이 어렵더라도 그간 성실하게 빚을 갚아온 차주들과의 형평성 문제가 불거질 수 있고, 소액 빚은 버티면 해결된다는 식의 모럴해저드가 확산될 수 있다는 점이 문제"라고 꼬집었다.

또 다른 은행 관계자도 "사실상 1000만원 이하 소액 신용대출이 대부분이고, 돌려받기 힘들어 시간이 지나면 소멸되는 채권들이어서 건전성 측면에서는 크게 부담이 되지는 않을 수 있다"며 "하지만 이는 신용심사를 할 때 중요한 자료 중 하나인데, 더 이상 연체 이력을 확인할 수 없어 심사가 왜곡되는 부작용이 나타날 수도 있고, 결과적으로 여신심사가 더욱 까다로워져 다른 차주들도 피해를 보게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여당이 추진 중인 '은행빚 탕감법(은행법 개정안)'도 대표적인 포퓰리즘성 정책으로 지목되고 있다.민형배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대표 발의한 이 개정안은 코로나19 등 재난 상황에 따라 영업 제한 또는 영업장 폐쇄 명령을 받거나 경제상황의 급격한 변동으로 인한 경제 여건의 악화로 소득이 현저히 감소한 사업자 등이 은행에 이자의 상환유예, 대출원금의 감면 및 상환기간 연장 등의 조치를 신청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이다. 이 개정안은 지난달 22일 국회 정무위원회에 상정돼 논의가 진행 중이다.

하지만 금융권 안팎에서는 은행에 대출원금 감면 등을 의무화하는 것은 재산권 침해, 은행의 건전성 저해, 다른 금융소비자로의 비용 전가 등 비판을 초래할 우려가 있고, 사기업인 은행에 과도한 부담을 주는 등 금융시장 전반에 대한 부작용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이용준 국회 정무위 수석전문위원도 검토보고서에서 "금융당국과 금융권 협회 간 협의를 통해 이미 대출금 만기연장, 원금·이자상환 유예 조치 등이 이뤄지고 있음을 고려해야 한다"며 "또 대출 원리금 상환유예와 관련된 해외 사례를 살펴보면 대출 원금 감면을 의무화하는 해외 입법례는 찾아보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이밖에 최고금리 인하, 이익공유제, 이자멈춤법 등도 전형적인 포퓰리즘 금융 정책으로 꼽힌다.

금융권 관계자는 "현 정부의 포퓰리즘 정책으로 성실하게 채무를 갚는 이들이 역으로 손해를 보는 상황이 이어지고 있다"며 "이러한 선심성 정책이 계속해서 남발되면 결국 금융시장의 원리가 왜곡돼 정상적인 시장의 기능이 작동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또 다른 금융권 관계자도 "올 1분기 시중은행들이 순이자마진(NIM) 개선으로 호실적을 기록했지만, 오는 9월 말 이후 대출 만기연장·이자상환유예 조치가 끝난 후 상황이 어떻게 될 지 알수가 없다"며 "그간 은행들이 자체적으로 충당금을 쌓으며 대비를 하곤 있지만, 일부 영향은 불가피할 것으로 예상된다"고 말했다.


◎공감언론 뉴시스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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