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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언의 책과 사람들]시간 역순으로 배치한 글, 왜?

등록 2021.05.22 06: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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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승극이 쓴 '다여집'

[서울=뉴시스]박승극의 수필집 '다여집'(사진=한상언 제공)2021.05.18 photo@newsis.com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뉴시스]박승극의 수필집 '다여집'(사진=한상언 제공)2021.05.18 [email protected]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뉴시스]  일제강점기 동안 소설집과 시집은 다수 나왔으나 수필집이 출간된 것은 그리 많지 않다. 박승극이 쓴 '다여집'(금성서원, 1938)은 이 시기에 출간된 몇 안 되는 수필집 중 하나로 우리 문학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책이다. 하지만 작가가 월북했다는 이유로 그리 잘 알려지지는 않았다.

박승극은 수원 출신으로 농촌을 배경으로 한 소설을 썼으며 문학평론가로도 그 이름이 알려져 있다. 1920년대 후반부터 1930년대 중반까지는 카프에 이름을 올렸는데, 문예운동뿐만 아니라 수원을 근거지로 농민운동과 각종 사회주의 계통의 운동에 나섰다는 점은 특기할 만하다.

이 책은 박승극이 수진농민조합 소작쟁의로 체포되었다가 석방된 1933년부터 이 책이 발간되기 직전인 1938년 5월까지 쓴 글 중 수상문과 기행문을 모았다.

책을 펼쳐 보면 가장 앞에 소개된 글이 1938년 5월에 쓴 '고독'이고 맨 마지막에는 감옥에서 나온 직후에 쓴 '사바잡기'(娑婆雜記)가 수록되었다. 다른 책과의 가장 큰 차이는 창작시간의 순서 혹은 비슷한 주제로 묶어 글을 배열한 것이 아니라 창작시간의 역순으로 글을 배열했다는 점이다.

왜 글의 배치를 시간의 역순으로 했을까? 책을 읽다보면 당시 박승극이 고민하고 있던 많은 문제들이 어떻게 진화되어 왔는지를 확인하게 된다. 마치 시간 더미 속에서 증거를 하나씩 찾아가는 듯하다. 1938년의 상황이란, 그가 프롤레타리아 운동을 포기하고 전향을 하게 되는 1934-5년 무렵보다 악화되어 있었고 심지어 1933년 감옥에서 나왔을 때보다도 더 짙은 어둠 속에 있었다.

아마도 그러한 분위기는 죽음과 관련되어 있어 그럴 것이다. 이 책에 수록된 가장 긴 글인 '천곡방문기'는 심훈의 대표작 '상록수'의 모델이 된 최용신의 무덤을 찾아가는 이야기이다. 한때는 활기에 넘치던 곳이 퇴락해져 가는 모습을 확인하고 인근에서 함께 활동하면서도 다른 길을 걸었던 시간을 회상하며 그의 죽음을 추모하고 있다. 또 다른 글에는 얼마 안 되는 원고료를 받게 되어 그 돈으로 함께 수진농민조합 쟁의운동을 펼치다가 사망한 남상환의 무덤에 비석을 세운 이야기가 나온다. "'시대와 문학'에 대하여"에는 발행이 취소된 그의 평론집 '시대와 문학'이 곧 발간된다는 내용을 지인에게 알리고 있다. 이렇듯 다양한 죽음을 확인하는 것이야 말로 이 책이 이야기 하고 싶은, 식민지적 삶의 본질이 아닌가 한다.

책의 서두에 표기된 작가의 알림을 보면 이 책이 "다여적 생활의 소산이라고 할 인생에 대한 것만을 수록했다"고 밝히고 있다. 바쁜 시간 사이의 빈틈에 가졌던 생각과 기행을 적어 둔 글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하지만 글을 읽다보면 그 여유란 유유자적과는 거리가 먼 절망과 고통의 시간들임을 알게 된다. 그나마의 여유 있는 삶이 '다여집'에 담겨 있다면 치열한 삶의 기록은 조판까지 마쳤으나 검열로 인해 출판이 취소된 평론집 '시대와 문학'에 담겨 있었을 것이다. 사실 '다여집'은 '시대와 문학'의 간행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이를 대신 해 나온 책이다.

이렇듯 일제강점기 조선인의 삶이란 '다여집'에 실린 글들이 마치 그림자처럼 보여주고 있는 죽음과도 같은 짙은 어둠일 것이다. 카프시절 함께 활동했던 이주홍이 맡은 이 책의 장정을 보고 있으면 아무도 돌보지 않은 무덤을 보는 듯하다. 우거진 잡초는 마치 봉분을 뒤덮고 있는 것처럼 무성하다.

▲한상언영화연구소대표·영화학 박사·영화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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