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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연희의 타로 에세이]눈을 감고 등불은 왜 들고 있을까....'9번 은둔자 카드'

등록 2021.07.03 06:00:00수정 2021.07.31 07:1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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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로 9번 '은둔자'. (사진=조연희 작가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타로 9번 '은둔자'. (사진=조연희 작가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뉴시스]  내가 탄 기차가 내가 원하는 곳이 아닌 레일이 깔린 곳으로만 달린다는 것을 알았을 때, 산다는 게 굴지성 식물처럼 조금씩 지상으로 고개 숙이는 일이란 것을 알았을 때 난 나만의 동굴 속으로 숨어들고 싶었다. 그곳에서 곰이나 개구리처럼 한 계절 푹 잠들고 싶었다. 물레에 찔려 잠든 숲속의 미녀나 독 사과를 먹고 잠든 백설 공주처럼 잠시 삶을 멈추고 싶었다.

혹독한 겨울이 지난 어느 따뜻한 날 기지개를 켜며 깨어날 수 있다면….  이 모든 괴로움을 건너뛰기 할 수 있다면….

동굴 습성

이런 증상을 심리학 박사인 존 그레이는 저서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에서 ‘동굴 습성’이라고 표현했다. 스트레스가 심하거나 고민이 많을 때 일명 동굴로 들어가 재충전하려는 습성이 있다는 것이다. 특히 남자에게 이 경향이 강하다고 했다.

그러나 비단 남자뿐일까. 모든 인간에겐 동굴로의 회귀본능이 있는 듯하다. 가장 원초적인 동굴은 어머니의 자궁이다. 인생이 고단할 때 동굴을 찾는 것은 어머니를 찾는 것과 같다.

우리 탄생 설화도 웅녀의 동굴로부터 시작되지 않던가. 곰이 인간이 된 곳도, 원효가 해골 물을 마시고 깨달음을 얻은 공간도 바로 동굴이었다. 이처럼 동굴은 치유의 공간이고 성장의 공간이고 깨달음의 공간이다. 

서울대 종교철학과 배철현 교수는 동굴이란 통찰이 일어나는 공간이라고 했다. ‘통찰(洞察)’의 ‘통’이 ‘동굴 동(洞)’자와 같은 것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삶이 알타미라 동굴 벽에서 일렁이던 그 불빛같고, 그 불빛에 이따금 반사되는 동굴벽화 같은 것처럼 느껴질 때 나도 누군가의 동굴이 되고 싶었다.

한 방울 두 방울의 눈물이 종유석을 이루고 일만 년, 이만 년의 기도가 석순으로 자라는 곳. 4억 년 전의 갈르와 벌레가 느릿느릿 기어 다니고 장님굴 톡토기들이 인화되지 않은 필름처럼 기억을 보관하고 있는 곳. 그곳에서 그와 조용히 서로의 상처를 치유하고 싶었다.

그러나 외래성 생물 같은 그에게 동굴이란 그저 길을 잃어 찾아든 곳이었다. 동굴 밖을 그리워하던 그는 내 안에서 퇴화되기 시작했다.

이승에서 떠도는 구천

9번 타로는 ‘은둔자’다. 마치 동굴에서 막 수행을 마치고 세상으로 나온 듯한 모습이다. 지혜가 농익은 모습이 고개 숙인 모습으로 표현돼 있다.

그런데 내 시선을 끈 것은 은둔자가 감고 있는 눈이었다. 그는 왜 눈을 감았을까. 눈을 감고 있으면서 등불은 왜 들고 있을까. 
  
플라톤은 동굴의 비유에서 우리가 보는 것은 실재가 아니며 벽에 비친 그림자일 뿐이라고 했다. 우리가 본다는 것이야말로 실재를 왜곡할 수 있다고 타로는 말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깨달음이란 보이는 세계 너머를 보는 것이고. 그것이 곧 통찰이라고.

그래서 은둔자는 눈을 감고 있다. 그러나 아직 보이는 것이 전부라고 믿는 이들에겐 등불이 필요하기에 그는 등불을 들고 서 있는 것이다. 은둔자의 통찰이야말로 세상의 등불일 것이기에 말이다.

10이 신의 숫자라면 9는 인간이 다다를 수 있는 가장 완전한 수이다. 타로는 비록 신이 되진 못했지만 인간으로서 가장 완전한 인간을 ‘깨달음을 얻은 인간’으로 보고 9번에 은둔자를 배치했다. 통찰의 능력을 갖춘 이가, 인간으로서 가장 성숙하고 완전한 인간이란 것이다.

인간은 10의 경지에 들 수 없다. 그래서일까. 다른 숫자들과 달리 9는 원형인 9에 그 배수를 더 하고, 그 배수의 숫자들을 끝까지 쪼개 더하면 최종적으로 숫자 9의 원형인 9가 남는다.

인간인 이상 우리는 천국 앞에 놓인 마지막 계단인 9를 넘어설 수 없다. 이 절체절명의 계단에서 우리는 비로소 겸손해지는 지도 모른다. 고개 숙인 은둔자의 모습이 숫자 9의 모습과 비슷하지 않은가. 

9+9=18, 1+8=9
18+18=36, 3+6=9
36+36=72, 7+2=9
72+72=144, 1+4+4=9
144+144=288, 2+8+8=18, 1+8=9
288+288=576, 5+7+6=18, 1+8=9
576+576=1,152, 1+1+5+2=9
1152+1152=2304, 2+3+0+4=9
2304+2304=4608, 4+6+0+8=18, 1+8=9
4608+4608=9216, 9+2+1+6=18, 1+8=9

숫자 9는 이승에서 떠도는 구천(九天)
비로소 고개 숙인 인간

단 한 가지 불행

이 글을 쓰는 지금도 창밖에선 온갖 소음이 들려온다. 공사 중인지 굴착기 소리와 드릴 소리가 이어지고 클랙슨이 요란하게 울려댄다. 아침에 읽은 뉴스에선 정치인의 공박과 독설, 성폭력 같은 입에 담고 싶지도 않은 범죄가 입만 둥둥 떠다니는 것처럼 허공에서 왁자지껄 떠들어대고 있다. 정말 조용할 날이 없다. 그래서 블레스 파스칼이 시니컬하게 말했던 것이다.

“인간의 모든 불행은 단 한 가지 사실에서 온다. 그것은 도무지 자기 방에 조용히 머물러 있지 못한다는 것이다.”

▲조연희 '야매 미장원에서' 시인 [email protected]

※이 글은 점술학에서 사용하는 타로 해석법과 다를 수 있으며,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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