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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연배의 이야기와 함께하는 와인] 나폴레옹의 최후 그리고 와인

등록 2021.07.10 06: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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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신화/뉴시스] 5월6일 프랑스 파리 앵발리드 군사박물관에 그림 '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Napoleon Crossing the Alps)'이 전시되어 있다. 2021.7.7photo@newsis.com

[파리=신화/뉴시스] 5월6일 프랑스 파리 앵발리드 군사박물관에 그림 '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Napoleon Crossing the Alps)'이 전시되어 있다. [email protected]

[서울=뉴시스]  1769년 유럽에서 향후 세계 역사를 바꿀 두 명의 중요한 인물이 태어난다. 그해 8월15일 지중해에 있는 프랑스령 코르시카에서 ‘나폴레옹 1세’ 되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태어났다. 그리고 그 석달 전 5월1일 아일랜드 왕국의 더블린에서 아서 웰즐리(Arthur Wellesley)가 태어났다. 후에 영국의 육군원수와 영국 총리를 역임한 웰링턴 공작이다.

두 사람은 모두 프랑스의 군사학교를 졸업한 인연이 있다. 나폴레옹은 16세 때인 1785년 파리에 있는 육군사관학교를 1년만에 졸업한다. 그리고 그 이듬해인 1786년 아서 웰즐리도 영국에 있는 이튼 스쿨을 중퇴하고 파리에서 300㎞ 떨어진 앙제에 있는 왕립군사학교에 입학해 그 다음해에 졸업했다.

와인의 역사에서도 두 사람은 만난다. 전 유럽을 휩쓸며 승승장구하던 나폴레옹은 영국을 압박하기 위해 대륙봉쇄령을 내리고 1807년 포르투갈과 스페인을 프랑스의 지배 체제에 편입한다. 하지만 포르투갈과 스페인은 격렬히 저항한다. 특히 와인을 중심으로 수세기 동안 대영 무역 의존도가 전체 교역량의 절반에 달했던 포르투갈은 도루(Douro)에서 계속 영국으로 와인을 수출하는 등 대륙봉쇄령을 무시한다. 이에 1807년 나폴레옹군이 이베리아 반도에 진출해 스페인에 입성한다. 하지만 스페인과 포르투갈 양국이 독립을 내걸고 항전하자 1808년 드디어 영국군이 포르투갈에 상륙해 승승장구하던 프랑스군을 연이어 격파한다. 이른바 ‘반도전쟁(Peninsular War)’이다. 이때의 영국군을 이끈 지휘관이 웰링턴 공작 아서 웰즐리였다.

하지만 나폴레옹이 직접 참전해 웰링턴과 교대한 영국군 사령관 존 무어 장군을 패퇴시키고 전세를 역전한 다음 귀국한다.

그러나 1809년 4월 웰링턴은 다시 포르투갈로 돌아와 프랑스군을 도루 강 유역의 와인 수출항인 포르투에 고립시키고 재탈환한다. 웰링턴은 와인 운반용 바지선을 이용해 병력을 날랐다. 그는 도루의 포르투 와인 생산업자의 아들이었던 부관 윌리암 와레(William Warre)로 하여금 포르투 와인을 구매해 런던으로 보내기도 하였다. ‘Warre’s’라는 포르투 와인 브랜드는 지금도 존재한다.

웰링턴은 계속해 스페인으로 진군했고 5년 동안의 반도전쟁에서 그곳에 있던 프랑스군을 완전히 몰아낸다. 역사가들은 이 전쟁을 나폴레옹 몰락의 시발점으로 보기도 한다. 그리고 6년후인 1815년 6월 웰링턴은 워털루 전쟁에서 나폴레옹에게 최후의 일격을 가한다.

나폴레옹은 전쟁에서 70번을 싸워 60번 이겼다. 반면 웰링턴은 나폴레옹보다 전쟁 횟수는 적었으나 한 번도 패배하지 않았다. 나폴레옹과 웰링턴은 서로 교유하거나 직접 만날 기회는 없었다. 같은 해 태어났지만 웰링턴이 30년을 더 살았다. 웰링턴도 와인 애호가였는데 저녁 식사를 할 때 꼭 와인 한 병을 마셨다. 나폴레옹은 영국인들이 저녁 식사를 마친 후 여자들은 집으로 보내고 남자들끼리 술을 더 마시면서 노는 것을 지칭해 ‘여자보다 술병을 더 좋아한다’고 비꼬기도 했다.

나폴레옹도 와인을 매우 좋아했다. “전쟁에 승리하면 샴페인을 마실 자격이 있지만 전투에 지면 와인을 마실 필요가 있다.” 나폴레옹이 한 말이다. 나폴레옹이 특히 좋아한 것으로 알려진 와인은 ‘모엣샹동(Moet & Chandon)’ 샴페인, 남아공 디저트 와인인 ‘뱅드 콩스탕스(Vin de Constance)’, 프랑스 보르고뉴의 피노누아로 만든 ‘제브리 샹베르탱(Gevery Chambertin)’, 로아르 지역의 ‘푸이이 퓌메(Pouilli Fume)’ 쇼비뇽 블랑, 프랑스 국경근처 리구리아 지역의 이탈리아 레드 와인 ‘로쎄세 디 돌체아쿠아(Rossesedi Dolceaqua)’이다.

[서울=뉴시스] 변연배 와인칼럼니스트

[서울=뉴시스] 변연배 와인칼럼니스트

1801년에 나폴레옹이 모엣 샹동을 주문했다는 첫번째 기록이 남아 있다. 또 프랑스 북부의 에페르니(Epernay)에 있는 샴페인 하우스를 몇 년간 직접 방문하기도 했다. 와인 셀라의 입구에는 ‘위대한 황제께서 1807년 7월 26일 쟝 레미 모엣의 안내로 본 셀라를 방문하시다’라는 현판이 아직도 걸려있다. 나폴레옹이 샴페인을 좋아하게 된 것도 가문에서 샴페인을 생산하는 오랜 친구인 장 레미 모엣 덕분이었다.

나폴레옹은 5~6년 숙성된 루비 색 샹베르탱을 좋아했는데 스페인이나 러시아 원정에도 가지고 갔다. 러시아 원정에서는 와인이 혹한에 얼지 않도록 시종이 가슴에 품고 있었다. “한 잔의 샹베르탱을 마신 것처럼 미래를 낙관적으로 보이게 만드는 것은 없다”라는 말을 남겼다.

세인트 헬레나 섬으로 유배되면서는 300갤런(1362L, 750ml로 1816병 상당)의 ‘뱅드 콩스탕스’ 와인을 가져갔는데 매일 한 병 정도를 마셨다. 와인을 물에 희석해서 마시기도 했다. 죽기 바로 전에는 모든 음식을 거부하고 샹베르탱 한 잔을 청했다고 한다. 그의 조카인 나폴레옹 3세도 프랑스의 와인 등급체계인 AOC를 처음 도입하여 와인의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

왕후였던 조세핀도 와인을 좋아했으며 훌륭한 미각을 가지고 있었다. 스스로 마시는 것은 썩 좋아하지 않았으나 파티 등을 위해 와인의 수집에는 정성을 쏟았다. 그녀는 나폴레옹과 이혼한 후 나이 오십에 폐렴으로 사망했지만 와인 셀라에는 헝가리부터 남아공까지 전세계로부터 온 13000병의 와인이 남아 있었다. 그 당시에는 별로 이름이 없었지만 지금은 유명한 샤토 라투르, 마고, 라피트, 오브리옹 등 보르도의 일등 급 와인이 리스트에 포함되어 있었다. 그녀는 와인의 추세도 알고 있었다. 전체 1만3286병의 와인 중 5973병이 보르도 와인이고 보르고뉴 와인은 419병에 불과했다.

절세 영웅은 가도 좋은 와인은 세상에 남는다. 

▲와인 칼럼니스트·경영학 박사·우아한 형제들 인사총괄 임원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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