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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언의 책과 사람들]남과 북이 지운 르포문학의 걸작, ‘노마만리’

등록 2021.08.14 06:00:00수정 2021.08.17 09:3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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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노마만리(사진=한상언 제공)2021.08.11 photo@newsis.com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뉴시스]노마만리(사진=한상언 제공)2021.08.11 [email protected]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뉴시스]  김사량이라는 필명으로 글을 쓰던 김시창은 중일전쟁이 한창이던 시기 일본 문단에 신선한 바람을 몰고 왔다. 처음 희곡을 쓰려했던 그는 일본 내 조선어극단인 조선예술좌에 가입해 활동했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극단은 강제 해산 당했고 이 과정에서 경찰에 체포되기도 했다. 이후 그는 일본의 유명 연극인 무라야마 토모요시(村山之義)가 이끌던 신협으로 근거지를 옮겼다.

이 무렵 신협에서는 장혁주가 극본을 쓰고 연출가 무라야마가 연출한 ‘춘향전’이 큰 성공을 거뒀다. 김사량 또한 이 작품이 만들어질 수 있게 동분서주했으며 무라야마의 ‘춘향전’을 영화로 만들려 했던 조선영화사주식회사의 촉탁으로 이름을 올렸다. 신협에서 그는 조선의 하층민을 소재로 한 ‘불가사리’라는 희곡을 썼으나 극단이 문을 닫으며 무대화되지는 못했다.

극작가로 변변한 활동이 없었던 김사량은 ‘춘향전’의 극본을 썼던 장혁주의 소개장을 들고 ‘문예수도’를 찾아갔다. 신인 발굴에 탁월한 감각을 지닌 야스다카 도쿠조(保高徳蔵)는 김사량이 일본어로 쓴 ‘빛 속으로’를 ‘문예수도’ 1939년 10월호에 실었다.

김사량의 ‘빛 속으로’는 일본 문단에 큰 파장을 가져왔다. 심지어 일본의 신인작가에게 수여되는 아쿠타가와(芥川)상 후보에까지 올랐다. 김사량은 수상에 실패했지만 수상자 못지않은 대우를 받았다. 1940년 3월 ‘문예춘추’에 ‘빛 속으로’가 전재된 것을 시작으로 여러 편의 작품이 일본의 문예지에 발표됐다. 같은 해 12월에는 오야마서점에서 김사량 작품집인 ‘빛 속으로’가 출간됐다.

중일전쟁의 한 가운데서 조선인 작가 김사량은 일본문단의 떠오르는 샛별처럼 각광받았다. 작가로서 명성이 높아갈수록 일제는 그에게 침략 전쟁에 동참할 것을 요구했다. 한편으로는 김사량은 불령선인으로 낙인찍힌 터라 태평양전쟁 발발을 앞두고 예비검속자로 체포당하는 등 고초도 당했다. 이런 이율배반적인 상황이 김사량을 대륙으로 향하도록 했는지도 모르겠다.

1945년 황군위문단의 일원으로 베이징으로 간 그는 조선의용군이 있는 연안의 태항산으로 탈출한다. 그곳에서 조선의용군의 일원으로 활동하던 중 해방을 맞았다.

해방 후 조선 문단에서는 독립운동에 투신하기 위해 조선을 탈출했다가 돌아온 문학인들에 주목했다. 김사량은 자신의 연안으로의 탈출기인 ‘노마만리’를 ‘신성’ 1946년 1호부터 연재했고 1948년 3월 ‘신성’에 연재했던 글을 정리해 평양 양서각에서 ‘노마만리’라는 제목의 단행본을 발간했다.

분단과 전쟁은 김사량이라는 작가를 기억 속에서 지워버렸다. 한국전쟁 중 인민군 전선시찰단으로 낙동강 전선에까지 갔던 그는 전황이 뒤바뀌어 급하게 후퇴하던 중 사망했다. 그러다보니 남한에서는 월북 작가라는 이유로, 북한에서는 1950년대 후반 숙청된 연안파의 활동을 그려낸 ‘노마만리’의 작가라는 이유로 그의 활동과 이름이 지워져 버렸다.

오랫동안 망각의 늪을 헤매던 그의 이름을 불러 낸 곳은 한때 그를 제국의 떠오르는 작가로 추켜세웠던 일본에서였다. 김달수를 비롯해 김사량과 교유하던 이들의 기억 속에서 떠돌던 이름은 일본에서 발간된 작품집을 통해 다시금 회자되기 시작했다.

남한에서는 월북작가 해금 후 르포문학의 걸작이라는 김사량의 ‘노마만리’를 중심으로 김사량에 대한 연구가 진행됐다. 하지만 양서각 판 ‘노마만리’를 어느 연구자도 확인하지 못한 탓에 초판 제목이 ‘노마만리’인지 ‘노마천리’인지 확정되지 못한 채 어지럽게 언급됐다.

몇년 전 중국에서 책등과 뒤표지, 판권지는 떨어져 나갔지만 표제지에 양서각이라는 출판사 이름이 박힌 바로 그 책을 구할 수 있었다. 김사량의 평양고보 동기동창인 화가 황헌영이 그린 표지는 김사량이 넘은 만리장성을 형상화하고 있었다. 이 책의 발견은 김사량 연구자뿐 아니라 장정을 맡은 북조선미술동맹 부위원장 황헌영의 솜씨를 확인할 수 있다는 면에서 미술사 연구자들에게도 희소식이었다.

특히 초판이 발굴됨으로써 ‘노마천리’라는 이름으로 출간되었다는 주장은 낭설임이 확인 된 것은 큰 수확이었다. 문학사의 빈 구석이 낡은 책의 발견으로 메워지게 되었으니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모르겠다.

▲한상언영화연구소대표·영화학 박사·영화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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