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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때 계엄군 하체 쏘다가 점점 상체 조준 사격"

등록 2022.05.20 21:4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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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민주화운동기록관, 80년 5월 의료인 현장보고 집담회

1980년 5월 21일 집단 발포 총상자 통해 잔혹 진압 확인

사후에는 보상 규모 축소 위해 폭도·비폭도 분류 작업도

[광주=뉴시스] 20일 오후 광주 동구 5·18민주화운동기록관에서 '하얀 가운의 오월시민군, 의료인 현장보고' 집담회가 열린 가운데 김성봉 교수(당시 광주기독병원 응급실장)가 증언하고 있다. 2022.05.20. leeyj2578@newsis.com

[광주=뉴시스] 20일 오후 광주 동구 5·18민주화운동기록관에서  '하얀 가운의 오월시민군, 의료인 현장보고' 집담회가 열린 가운데 김성봉 교수(당시 광주기독병원 응급실장)가 증언하고 있다. 2022.05.20. [email protected]

[광주=뉴시스]이영주 기자 = 1980년 5월21일 계엄군이 옛 전남도청 앞에서 의도적으로 시민들의 상체를 조준 사격했을 것이라는 의료인 증언이 나왔다.

5·18민주화운동기록관은 20일 기록관 다목적 강당에서 '하얀 가운의 오월 시민군, 의료인 현장보고' 집담회를 열었다.

이날 구술 증언에 참여한 김성봉 당시 광주기독병원 응급실장은 1980년 5월21일 동구 금남로에서 자행된 계엄군의 집단 발포 과정에 의도적인 상체 조준 사격이 있었을 것이라는 의혹을 제기했다.

김 실장은 "석가탄신일이었던 당시 광주기독병원은 정상 운영하고 있었다. 점심이 지나고 약 1시께 바깥에서 콩볶는 소리가 들려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며 "곧이어 총상을 입은 환자들이 병원으로 몰려들었다"고 말했다.

그는 "총상 환자들을 면밀히 들여다보니 처음 도착한 환자들은 대부분 허벅지 아래쪽에 총상을 입은 채 병원에 실려왔다"며 "그러나 점점 시간이 지날 수록 복부와 가슴, 머리에 총상을 입은 환자들이 찾아왔다"고 설명했다.

이어 "이는 군인들이 처음에는 훈련을 받은 대로 하체를 조준 사격하다 점점 상체를 노려 쏜 정황이다"며 "이는 마치 짐승을 사냥하는 듯한 모습이었다"고 밝혔다.

또 "전날인 20일 밤 입원한 20대 남자의 경우 좌측 쇄골 직상부에 총상을 입은 채 병원에 도착했다. X선 촬영 결과 윗가슴 뒤편에 산탄과 같은 것들이 퍼져서 박혀있었다"며 "다음날 금남로 집단 발포 당시 총상 환자들의 X선 소견도 비슷했다. 수술해 확인해보니 얇은 총알 껍질 속에 납탄이 들어있어 산산조각나면서 치명적인 상해를 입힌 것"이라고 강조했다.

[광주=뉴시스] 20일 오후 광주 동구 5·18민주화운동기록관에서 '하얀 가운의 오월시민군, 의료인 현장보고' 집담회가 열린 가운데 문형배 교수(당시 전남대병원 병리학과 검시담당)가 고뇌하고 있다. 2022.05.20. leeyj2578@newsis.com

[광주=뉴시스] 20일 오후 광주 동구 5·18민주화운동기록관에서  '하얀 가운의 오월시민군, 의료인 현장보고' 집담회가 열린 가운데 문형배 교수(당시 전남대병원 병리학과 검시담당)가 고뇌하고 있다. 2022.05.20. [email protected]

전두환 보안사가 사후 보상 규모 축소를 위해 숨진 광주시민들을 대상으로 폭도와 비폭도로 나누는 작업을 진행했다는 증언도 이어졌다.

문형배 당시 전남대병원 병리학과 전공의(3년차)는 "(1980년) 6월10일께 보안사에서 연락이 와 군인 짚차를 타고 저녁께 505 보안대에 도착했다. 당시 505보안대 작전참모 모 중령 등 11명이 한 방에 모였다"며 "당시 이곳에서 숨진 165명의 광주 시민들에 대한 폭도와 비폭도 분류 작업을 했다"고 밝혔다.

그는 "보안사는 '폭도는 죄인이고 비폭도에겐 후한 보상을 하겠다'고 말했다"며 "이에 저와 다른 민간인 대표들은 보상을 많이 받게끔 하자는 취지로 '모두가 비폭도다'고 설명했다"고 말했다.

또 "보안사는 '광주교도소 인근에서 숨진 시민들과 27일 도청에서 숨진 시민들은 모두 폭도다. 21일 총상을 입고 숨진 시민도 폭도다'는 논리로 최소 100명 이상을 폭도로 몰 것을 주장했다"며 "저는 '총상의 사입구와 사출구를 분류해 최소한 무고한 비폭도는 만들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을 내세우며 논쟁을 했다"고 증언했다.

그러면서 "끝내 보안사는 60여 명을 '폭도'로 규정지어 버렸다. 진상이 모두 드러난 현재 폭도는 대체 어디있느냐"며 "보안사의 사과는 아직까지도 없다"고 지적했다.


◎공감언론 뉴시스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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