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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성범죄 혐의 '국민참여재판'의 맹점

등록 2022.06.13 15:11:27수정 2022.06.13 16:5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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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성범죄 혐의 '국민참여재판'의 맹점


[서울=뉴시스]신귀혜 기자 = "그 때 상황을 배심원들께 재연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증인, 지금 원피스를 입고 있는데 그때 입은 것과 같은 원피스입니까?"(담당 공판검사·지난 7일 전직 서울대학교 교수 A씨 국민참여재판 공판기일)

지난 7~8일 이틀 간 서울중앙지법 417호 대법정에서는 전직 서울대 서문과 교수 A씨의 강제추행 혐의에 대한 국민참여재판이 열렸다. 피해자는 사건 당시와 같은 옷을 입고 증언에 나섰다. 피해자는 자신의 기억대로 당시 상황을 재연했고, 배심원들이 그 모습을 지켜봤다.

국민참여재판에서는 하루 내지는 이틀, 짧은 시간 안에 공소장 낭독부터 판결 선고까지 모든 절차를 끝낸다. 공판 당일에 사건을 처음 접했을 배심원들 역시 짧은 시간 내에 모든 절차를 소화해야 한다.

이번 A씨 국민참여재판에는 피해자를 포함해 총 3명의 증인이 출석했고, 피고인 신문도 함께 진행됐다. 이들은 이틀에 걸쳐 증언을 이어갔다. 증인신문 과정에서 많은 인물들이 등장했다. 대학원 내의 학생 지도 절차, 장학금 제도, 회식 분위기 등도 중요하게 다뤄졌다. 배심원들이 소화해야 할 증거기록이 쉴 새 없이 제시됐다.

훈련되지 않은 일반인인 배심원들이 몇 년 간 쌓인 인간관계의 맥락을 짧은 시간 내에 듣고 유·무죄 판단을 내리는 일은 순탄치 않아 보였다.

실제 배심원들은 공판 진행 중 이미 진술한 내용을 되묻거나 사건과 관련이 적어 보이는 내용의 질문을 하기도 했다. '피고인의 행동이 피해자를 돕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되지는 않았는지' 등 다소간 피고인의 시각에서 떠올린 듯한 질문도 있었다.

배심원들의 결론은 무죄였고 재판부는 평결에 따라 A씨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피해자의 진술이 일관되지 않은 부분이 있고, 피해자가 당시 느꼈을 불쾌감은 인정되지만 이를 강제추행으로까지는 볼 수 없다는 게 요지였다.

성범죄 사건에서는 사건 당일의 범죄사실뿐만 아니라 사건 전후 관계, 소속 집단의 분위기 등이 쟁점이 되곤 한다. 이번 국민참여재판에서도 학과 분위기, 사건 전후 피해자·피고인의 연락 내용, 피해자의 행적은 중요한 쟁점이었다.

결국 성범죄 사건의 판단을 위해 짚어내야 할 것은 양측의 관계와 그 속에서 벌어진 사건의 맥락일 터. 공판 중 제시된 관련성이 떨어지는 증거들을 배제해야 할 것이고, '피해자다움'에 대한 편견 등 사건 외적 요소들도 판단 과정에서 극복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국민 배심원들의 판단을 위해 주어진 시간은 그들이 이해하고 고려해야 할 내용의 양에 비해 턱없이 짧았다. 판단을 위한 배경지식 습득 등 별도의 준비 절차가 없었음은 물론이다.

국민참여재판 도입 후, 지난 10년 간 성범죄 사건의 무죄율은 14%에서 48%까지 뛰었다고 한다. 실형이 선고되는 비율은 같은 기간 65.5%에서 39.1%로 떨어졌다. 이미 법조계에서는 '성범죄 형량을 낮추기 위해 국민참여재판을 이용한다'는 지적이 잇따르는 실정이다.

성범죄 피해자 대리 경험이 있는 한 변호사는 "피고인 측에서 범죄사실과 직접 관련 없는 증언을 통해 피해자 진술을 탄핵하려는 경우가 많다"며 "국민참여재판을 통해 이 '전략'의 효과를 보려는 것"이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법적 관점으로든, 피해자 중심주의적 관점으로든 훈련되지 않은 일반인 배심원들의 특성을 이용하려 한다는 것이다.

국민참여재판은 사법의 민주적 정당성과 신뢰를 높이기 위해 도입됐다. 이는 배심원들이 검사와 변호인의 말에 압도된 채 거수기처럼 행동하라는 의미는 아닐 것이다.

공판에 출석하는 이들의 긴 시간 증언이 헛되지 않으려면 배심원들이 충분히 준비돼 있어야 한다. 배심원들에게 충분한 시간도, 정보도, 배경지식도 제공되지 않는 지금의 국민참여재판으로는 진정한 의미의 '국민 참여' 실현이 어려워 보인다.


◎공감언론 뉴시스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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