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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언의 책과 사람들] ‘오징어게임’에서 ‘반역자의 모’까지…

등록 2022.08.13 06: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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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 반역자의 모 (사진 =한상언 영화연구소대표·영화학 박사·영화사가 제공) 2022.08.04. photo@newsis.com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뉴시스] 반역자의 모 (사진 =한상언 영화연구소대표·영화학 박사·영화사가 제공) 2022.08.04. [email protected]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뉴시스] 휴가 시즌이 시작됐다. 천안 외곽 마정저수지 주변에 자리한 책방은 더욱 한산해졌다. 점심시간에 커피를 마시러 오는 주변 직장인들의 수가 눈에 띄게 줄었고, 저수지에 바람을 쐬러 오던 사람들 역시 산으로 바다로 피서를 떠났는지 보이지 않는다.

한적한 휴가철 오후 책방으로 러시아인 부부가 찾아왔다. 외국인이 시골의 한가한 책방을 방문한 게 반가워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 물었다. 그들은 둔포에 살면서 평택으로 직장을 다니는데, 휴가를 맞아 드라이브를 하러 나왔다가 책방이 보여 들어왔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러시아에서 한국의 이미지가 좋다며 케이팝과 드라마 ‘오징어게임’의 인기에 대해 이야기 했다.

책방을 둘러보던 이들은 서가에 전시되어 있는 막심 고리키(Maxim Gorky)의 ‘어머니’를 보고 반가워했다. 나는 그들에게 1907년에 미국에서 나온 영문 초판이라고 이야기했다. 고리키는 1906년 여름, 미국 여행 중에 ‘어머니’를 쓰기 시작했고 그해 미국의 ‘애플튼 매거진’(Appleton's Magazine)에 연재를 시작했다. 다음 해인 1907년 영문 단행본이 출판됐다. 반면 러시아에서는 검열로 인해 잡지 연재가 불발됐고, 최초 출판은 러시아혁명이 발발한 1917년에나 가능했다. 그렇게 생각해 보면 책방에 전시된 영문판은 ‘어머니’의 가장 오래된 버전으로, 자랑할 만한 책이다.

나는 이들에게 고리키의 또 다른 작품인 ‘반역자의 모’(반역자의 어미)를 보여줬다. 1924년 경성 평문관에서 발행된 책으로, 고리키의 작품 중 처음으로 우리말로 번역 출판된 것이다.

이 책의 번역자는 신태악(辛泰嶽)이다. 그는 우리에게 번역가라기보다는 법조인 혹은 정치인으로 알려져 있는 인물이다. 3·1운동으로 옥고를 치뤘던 그는 1931년 고등문관시험 사법과에 합격 후 변호사가 돼 일제 말기 임전보국단 등 친일단체에 가담했다. 해방 후 대한변호사협회 회장을 맡았으며, 박정희 정권 하에서는 야당 정치인으로 활약한 흥미로운 이력의 인물이다.

이 책은 문제적 인물인 법조인 신태악의 문청(文靑) 시절의 흔적을 확인하게 만든다. 사실 신태악은 ‘반역자의 모’ 이전에 이미 ‘세계10대문호전’(이문당, 1922)이라는 책을 발간한 적이 있었다. 이뿐 아니라 조르주 멜리에스(Georges Méliès)의 영화로 더 유명한 쥘 베른(Jules Verne)의 ‘달세계 여행’(박문서관, 1924) 역시 우리말로 번역했다. 그의 문필 활동은 고전문학에서 당대의 문학까지 두루두루 퍼져 있다. 특히 3·1운동 이후에는 러시아 혁명의 영향으로 고리키의 작품에 관심을 기울인 듯 보인다.

‘반역자의 모’에는 고리키가 이탈리아 망명 시절 썼던 소설을 모은 단편집 ‘이탈리아 이야기’에 수록된 작품 중 7편이 실려 있다. 이 책은 일본의 극작가 와타리 헤이민(渡平民)이 1920년 번역했는데, ‘이탈리아 이야기’에 수록된 단편소설 중 하나인 ‘반역자의 모’를 표제로 삼았다. 신태악은 와타리 헤이민의 일본어 번역본을 우리말로 중역해, ‘이탈리아 이야기’가 아닌 ‘반역자의 모’가 제목이 됐다.

‘반역자의 모’를 살펴보던 러시아인 부부는 책에 수록된 고리키의 사진을 보고 반가워했다. 낯선 책에서 발견한 고향의 모습일 테다. 그들과의 짧은 만남은 진한 잔향을 남겼다. 고리키에서 ‘오징어 게임’까지 이야기 할 수 있을 정도로 러시아와의 문화적 교류는 길고 진하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백년 전 고리키의 작품을 번역해 읽던 우리가 이제 러시아에 케이팝과 케이드라마로 영향을 주고 있다는 데에는 뿌듯함을 느꼈다. 그야말로 격세지감이다.

▲한상언 영화연구소대표·영화학 박사·영화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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