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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연배의 이야기와 함께하는 와인] 원나라, 고려에 와인을 보내다

등록 2023.01.21 06: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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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펑(중국)=신화/뉴시스] 2019년 9월19일 중국 내몽골자치구 치펑시 하얼친치 마안산 마을에서 한 주민이 포도를 수확하고 있다. photo@newsis.com

[치펑(중국)=신화/뉴시스] 2019년 9월19일 중국 내몽골자치구 치펑시 하얼친치 마안산 마을에서 한 주민이 포도를 수확하고 있다. [email protected]

[서울=뉴시스]  당나라 이후 중국은 송(宋), 원(元), 명(明)을 거치며 토번, 몽골 등 이민족 세력에 밀려 서역 일대 거점을 천년동안 상실한다. 18세기 중엽이 돼서야 청나라가 다시 이곳을 점령한 후 중앙아시아를 제외한 신장·티베트 지역을 영토에 편입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송나라 시절은 중국 와인의 침체기였다. 서북쪽 땅을 잃어 서역으로부터 와인을 공급받는데 제한이 있었고, 술 문화나 와인의 생산도 미진했다. 이때는 ‘황주’(黃酒)의 전성기였다. 황주는 쌀이나 좁쌀로 빚는데 와인과 맥주에 이어 오래된 술이다. 하지만 상류층의 와인 소비에는 큰 변화가 없었고, 내륙에 위치한 산서(山西)성 태원(太原) 같은 주요 와인 산지의 역할은 더 커졌다. 후한(後漢) 사람인 맹타(孟佗)의 와인 뇌물 사건을 풍자했던 시인 소동파(소식(蘇軾), 1037~1101)는 ‘장태원송포도’(張太原送葡萄)에서 그가 어려운 처지에 있을 때에도 매년 와인을 보내주며 의리를 지킨 장(張)씨 성을 가진 태원 현령에게 감사를 표하기도 했다.

원나라의 역사는 채 100년이 되지 않지만, 그 시절 와인 산업과 문화는 최고 전성기를 누렸다. 1206년 몽골을 통일한 칭기즈 칸은 1223년 호라즘을 정벌한데 이어 페르시아만과 카스피해 유역까지 진출했다. 당시 호라즘은 와인 기원지인 코카서스 산맥 남쪽을 지배하고 있었다. 1227년 칭기즈 칸이 사망한 이후에도 몽골은 확장을 계속해 인류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정복한 제국으로 발전한다.

칭기즈 칸의 손자이자 몽골제국 제5대 칸인 쿠빌라이는 1271년 원나라를 건국하고, 1276년에는 남송(南宋)을 병합해 중국을 통일한다. 하지만 1264년 쿠빌라이가 대칸이 되는 과정에서 제국은 분열한다. 특히 서역의 차가타이 한국을 통치했던 카이두(海都, 1235~1303)는 사망 전까지 50년간 몽골의 정통성을 두고 본국과 싸웠다. 카이두는 제2대 칸인 오고타이의 손자로 와인을 비롯해 술을 마시지 않았다. 반면 그의 조부인 오고타이는 와인을 시도 때도 없이 마셨다. 푸치니의 오페라 ‘투란도트’에 나오는 투란도트 공주는 카이두의 딸인 쿠툴룬이 모델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기간 카이두에 막혀 서역을 통한 실크로드는 단절된다. 대신 원나라는 남송의 선박 건조기술과 항해술을 이용해 해상 무역로를 개척했다. 1283년부터 1285년까지 2년간 조운선 5000척이 건조됐고 무역로는 인도네시아 자바 섬, 인도, 페르시아 호르무즈 만으로 연결됐다.

쿠빌라이 칸은 76세가 되던 1291년, 대도(大都, 지금의 베이징)의 궁궐에 와인 셀러를 설치할 정도로 와인 애호가였다. 명나라 송염(宋濂, 1310~1381)의 ‘원사’(元史)에도 쿠빌라이가 조상의 제사에 와인과 마내주(馬奶酒, 마유주(馬乳酒))를 올렸다는 기록이 있다. 17년간 원나라와 몽골을 탐험했던 마르코 폴로는 ‘동방견문록’에서 지금의 베이징이나 탁주(涿州) 같은 하북(河北) 지방에 조성된 대규모 포도밭과 와인에 대해서 언급했다. 지금의 산서성과 산동성, 하남성 일대에도 포도밭이 무성했다.

카이두 사후에는 원나라의 글로벌 네트워크가 회복돼, 멀리 코카서스 남부에서도 대량의 와인이 들어온다. 몽골군이 이슬람에서 들여온 증류법으로 포도주를 증류해 지금의 브랜디와 같은 증류주도 처음 만들었다. 이것도 ‘소주’(燒酒)라 불렀다.

몽골의 침입에 맞서 벌인 30년간의 전쟁에 지친 고려는 1259년 몽골에 화의를 청하러 세자 왕전(王倎)을 몽골 4대 칸인 몽케에게 보낸다. 하지만 당시 몽골에서는 몽케 칸의 사망으로 왕위 계승 전쟁이 일어났다. 왕전은 수천㎞ 떨어진 전쟁터에 있던 쿠빌라이를 직접 찾아가 지지를 표해 그와 돈독한 관계를 맺는다. 왕전이 바로 고려 24대 왕, 원종(元宗)이다. 그의 맏아들 왕심(王諶)은 쿠빌라이의 막내딸인 제국대장공주와 혼인해 3년간 원나라에 체류한 후, 1274년 25대 충렬왕이 된다. 대칸의 부마로, 한때 ‘쿠릴타이’(몽골의 부족회의)에서 서열이 4위였다. 충렬왕과 제국대장공주 사이에서 태어나 쿠빌라이의 외손자가 되는 26대 충선왕은 주로 원나라에 머물면서 원격근무로 고려를 다스렸다.

원나라는 통치를 하는데 와인을 활용하기도 했다. 고려 왕실에도 와인을 보냈다. 조선 초 편찬된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는 쿠빌라이 생전인 1285년, 사후인 1296~1298년과 1302년, 1308년에 원 황제가 고려에 와인을 하사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명나라 시절 와인 산업은 특별한 발전이 없었다. 그러나 민간에서는 이미 와인이 일상화돼 있었다. 이시진(李時珍, 1518~1593)이 지은 ‘본초강목’(本草綱目)에는 와인의 양조법과 의학적 효능이 기술돼 있다. 또 서역, 하남 지역, 저장성 평양, 산서성 태원 순으로 와인 산지의 등급도 매겼다.

청나라의 강희제(康熙帝)도 와인을 좋아했다. 청 말기에는 서양의 와인과 양조 기술이 들어온다. 샴페인은 서태후가 처음 마셨다. 서양 선교사가 선물한 샴페인을 따면서 큰 소리가 나자 시녀가 놀라서 도망갔다는 기록도 보인다. 1892년에는 산동의 연태(煙臺)에 현대식 설비와 오크통을 사용한 ‘장유(張裕)양조공사’가 처음 설립돼 130년이 지난 현재까지 생존한다.

중국은 2021년 기준 세계 6위 와인 소비국이자 세계 5위 와인 수입국이며 전 세계 포도의 절반이상을 생산한다. 와인 생산량으로는 2019년 세계 7위를 기록했으나, 코로나 영향으로 현재는 세계 10위권이다.

▲와인 칼럼니스트·경영학 박사·딜리버리N 대표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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