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이상 익명 제보 안 받겠다"…대학가 미투 위축되나
"가장 파급력 있는 익명 창구" vs "마녀사냥 멈춰야"
소통 창구 제한되면 피해자들 고발 노력 위축 우려
"대학 당국 자체의 성범죄 처리 시스템 점검 필요"
【서울=뉴시스】김지은 기자 = 일부 대학교에서 성폭력 제보 내용을 SNS(사회관계망서비스)에 게재하지 않겠다고 밝혀 논란이 일고 있다. 일종의 '눈치 주기' 현상이 피해자들의 미투 고발 운동을 위축시킬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최근 한양대학교 대나무숲은 공지 게시글을 통해 "더 이상의 미투 관련 제보는 업로드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대나무숲은 익명성을 기반으로 특정 집단 구성원들끼리 활발한 활동을 벌이는 SNS 계정이다.
한양대 대나무숲은 "미투 운동을 지지하지만 대나무숲의 특성상 사실 확인이 어렵다"며 "또 원칙적으로 특정 개인을 저격하거나 유추할 수 있는 제보는 지양하고 있다"고 이유를 설명했다.
이어 "SNS 관리자들이 몇몇 (미투) 게시글로 인해 협박과 욕을 듣고 허위 제보가 아니었음에도 개인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이유로 고소를 당하는 등 많은 일들을 겪었다"고 전했다.
이 같은 글이 게재되자 학생들 사이에는 댓글을 통한 논쟁이 벌어졌다. "대나무숲 이외에는 그만큼 파급력 있는 익명 창구가 없다", "성폭력 피해자들의 목소리에 힘을 실어달라"는 반대 의견과 "억울한 마녀사냥을 멈춰야 한다", "애꿎은 관리자들이 고초를 겪을 필요는 없다"는 찬성 목소리가 충돌했다.
한양대 대나무숲 측은 입장을 철회하지 않은 상황이다. 이에 따라 현재 대나무숲에는 일반적인 대학 생활과 연애 등에 관한 글만 올라오고 있다.
지난 23일 건국대학교 대나무숲에는 "이곳은 사회 이슈에 대해 논쟁이 일어날만한 글은 필터링하는 게 원칙이냐. 토론이 있을 법한 글 자체를 거의 올리지 않는 것 같다"는 문제 제기성 글이 올라왔다.
【서울=뉴시스】이영환 기자 = 22일 오후 서울 종로구 청계광장에서 미투 운동과 함께하는 시민행동이 주최한 2018년 성차별, 성폭력의 시대를 끝내기 위한 2018분 말하기 대회가 진행되는 가운데 미투 대자보 게시판을 한 시민이 바라보고 있다. 2018.03.22. [email protected]
한양대에 재학 중인 여대생 윤모(22)씨는 "부정확한 정보는 공론화되면 안 된다는 의견이 대세가 되면 누가 자신있게 나서서 미투를 하겠는가"라며 "성추행, 성희롱이 증거를 마련하기도 어려운 상황에서 피해자들의 입을 막는 결과"라고 비판했다.
대학가에서는 미투 운동이 진지하게 받아들여지지 않고 농담의 소재가 되는 분위기도 흔하다.
지난 22일 성균관대학교 대나무숲에는 한 제보자가 "제 주변에서 미투 운동을 장난식으로 언급하는 상황이 많아져 불편하다"며 "성폭력 피해자들의 눈물을 개그화시키는 건 폭력이 될 수 있다는 걸 명심해주었으면 좋겠다"고 글을 올렸다.
학교에서 성희롱 발언을 공론화하고 싶지만 선뜻 꺼내지 못하고 있다는 대학생 이모(21)씨는 "요새는 잠깐 스치고 지나가도 '이걸로 미투할 거 아니지'라고 하는 등 피해자를 예민한 사람으로 만드는 일이 많다"며 "이런 분위기에서 미투 이후에 사람들 반응을 감당할 수 있을까 고민이 된다"고 토로했다.
전문가들은 대학 당국 자체에서 성폭력에 대해 올바르게 문제를 제기하고 이를 처리할 수 있는 창구들을 점검해야 할 때라고 조언한다.
한국여성민우회 성폭력상담소의 신혜정 활동가는 "대나무숲의 관리자 입장에서는 고소 등 현실적인 문제를 생각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며 "대학교 자체와 상담기관 등에서 제대로 된 성범죄 창구 역할을 못하기 때문에 익명 폭로가 이어지는 만큼 자체적 점검이 근본적으로 필요한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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