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페이스북
  • 트위터
  • 유튜브

33일만에 서거한 요한 바오로 1세 시복 앞두고 피살 음모설 또 등장

등록 2021.12.09 13:18:25

  • 이메일 보내기
  • 프린터
  • PDF

서거 43년만에 복자 시복 앞둔 지금까지도

"신의 이름으로"라는 책에서 본격 제기한

교황청 고위층에 의한 독살설 여전히 횡행

사실 조사 노력 이어졌으나 주목 못끌어

요한 바오로 1세 교황의 생전 모습 *재판매 및 DB 금지

요한 바오로 1세 교황의 생전 모습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뉴시스] 강영진 기자 = 1978년 교황으로 취임한 뒤 33일만에 심장마비로 서거한 것으로 발표된 요한 바오로 1세를 시복(諡福)하는 과정이 마지막 단계에 이르렀지만 그의 죽음을 둘러싼 미스테리와 음모론이 가라앉지 않고 있다고 미국 워싱턴포스트(WP)가 8일(현지시간) 보도했다.

로마 교황청은 1978년 9월29일 요한 바오로 1세가 자신의 침실에서 심장마비로 서거한 것을 개인 비서인 수사가 발견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며칠 뒤 피살됐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고 로마 교황청 추기경들이 사실을 바로잡으라고 압박했다. 이탈리아 통신사가 최초 발견자를 교황청이 잘못 발표했다고 보도했으나 의문설이 사라지키는커녕 오히려 커졌다. 65세의 교황이 취임한 지 33일만에 서거한 것을 납득시키기란 여간 어렵지 않았다.

40년이 지나서 요한 바오로 1세를 성인으로 추대하는 과정이 진행되고 있다. 바티칸 교황청은 요한 바오로 1세가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중병에 걸린 11살 짜리 소년이 병에서 낫게한 것을 기적으로 인정해 복자로 시복할 예정이라고 발표했다.

요한 바오로 1세가 추앙되는 만큼이나 그의 서거를 둘러싼 의혹도 끈질기게 이어지고 있다.

몇 사람들이 몇 년에 걸쳐 사건을 파헤쳤다. 각자 접근 방식이 크게 달랐고 사실을 밝혀내는데 기여한 대목은 별로 없었다.

요한 바오로 1세가 다른 사람들과 무척 다른 인물이었다는 점은 모두가 동의했다. 그는 이탈리아 산간지대 촌구석의 가난한 집안 출신이었다. 그는 시골 신부보다 높이 오르겠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그는 26시간 동안 계속된 콘클라베(교황선출회의)에서 갑작스럽게 선출됐고 취임 뒤 좋은 인상을 남겼다. 교황이 누리던 사치를 폐지하고 쉬운 말을 썼다.

교황 취임 첫 날 요한 바오로 1세는 "꿈조차 꿀 수 없었던 일"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한달 뒤 교황 임기가 끝났다. 1600년 교황청 역사에서 가장 짧은 재임기간이었다. 가톨릭은 세상을 향해 교황의 서거를 납득시켜야만 했다.

교황청은 왜 첫 발견자를 잘못 발표했는가? 서둘러 방부처리를 하고 부검을 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 이런 의혹이 몇 년 이어진 끝에 영국 범죄작가 데이비드 얄롭이 교회가 살인을 덮었다고 주장하는 책을 썼다. 요한 바오로 1세가 바티칸 최고위층의 부패를 폭로하기 직전에 바티칸 권력집단이 그를 독살했다는 내용이었다.

1984년 "신의 이름으로"라는 제목으로 출판된 얄롭의 책은 소식통이나 증거를 거의 제시하지 않았다. 그러나 바티칸 은행 스캔들에 힘입어 대중의 지지를 받았다. 바티칸 은행 스캔들은 프리메이슨 단체와 의문의 죽음을 당한 이탈리아 은행가가 관련된 사건이었다. 얄롭은 요한 바오로 1세의 서거도 이와 관련됐다고 주장했다. 교황이 부패를 살펴보면서 바티칸 권력 집단이 궁지에 몰렸다는 것이다. 얄롭은 교황이 갑작스럽게 사라짐으로써 이득을 본 6명을 지목했다. 그중 한 사람이 체격이 큰 바티칸 은행 수장 폴 마킨커스 대주교였다.

얄롭은 책에서 마킨커스가 요한 바오로 1세의 시신이 발견된 날 이른 새벽에 바티칸 성벽 안에서 목격되자 크게 놀랐다면서 "마킨커스에게는 동기와 기회가 있었다"고 썼다.

바티칸 교황청은 그같은 주장이 "터무니없다"고 밝혔지만 책 내용은 요한 바오로 1세의 서거과정에 대한 바티칸의 설명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것이었다. 이 책은 600만부가 팔렸다.

각종 의혹에 대해 설명하려는 시도를 거의 하지 않는 교회의 관점에서 볼때 가톨릭이 이례적으로 반격에 나섰다.
 
1987년 바티칸 공보청 존 폴리 대주교가 영국 언론인 겸 작가인 존 콘웰에게 오류를 바로잡아 달라고 요청했다. 신학대학 출신이지만 신부가 되기를 포기한 콘웰이 교황청의 주요 관계자들을 탐문했다. 그를 지원하기 위해 마련한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주관 미사에 그가 참석한 뒤로 많은 관계자들이 그의 조사에 응했다.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음모론이 잘못된 핵심 대목을 밝혀냈다. 바티칸은 교황의 아파트에서 일하는 수녀가 교황 방에 들어간 것을 밝히길 꺼려해 최초 발견자를 허위로 발표했다는 것이었다. 또 요한 바오로 1세가 비밀리에 교회의 재정문제를 파헤친 적도 없다는 것이었다. 마킨커스를 살인자로 몬 정황증거가 잘못됐다는 점도 어렵지 않게 밝혀냈다. 아침 일찍 일어나는 마킨커스 대주교는 아침 6시30분이면 바티칸에 출근하곤 했다는 것이다.

콘웰은 바티칸 교황청이 원하던 대로 일을 해냈다. 그러나 그는 기관의 대변자일 뿐이었다. 

콘웰의 주장에 따르면 요한 바오로 1세의 짧은 재임은 재앙으로 치닫고 있었으며 바티칸의 많은 사람들이 그걸 알 수 있었다. 바티칸 교황청은 새 교황을 세련되지 못하고 어린애 같으며 "리더스 다이제스트식 사고방식"을 가졌다고 조롱했다. 또 요한 바오로 1세가 자신의 역할에 짓눌렸다고 했다. 요한 바오로 1세 수행 비서 수사와의 인터뷰에 과도하게 의존한 콘웰은 교황이 매일같이 "왜 나를 교황에 앉혔냐?"고 질문했다고 썼다. 요한 바오로 1세 스스로 자신을 선출한 것이 큰 실수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현재 81세인 콘웰은 "그는 훌륭한 교황이 될 수 없었을 것"이라고 최근 인터뷰에서 밝혔다.

콘웰은 요한 바오로 1세가 심장마비나 색전증으로 자연사했다는 걸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다. 요한 바오로 1세는 심혈관계 질환을 앓고 있었다. 다리가 부어 있었고 서거하기 전 몇 시간 동안 계속 가슴 통증을 호소했다.

그러나 콘웰의 책은 요한 바오로 1세의 서거를 정신적 취약성과 연결지음으로써 큰 논란을 일으켰다. 책에는 교황이 통증을 호소하면서도 직원들이 의사를 부르는 것을 거부했다고 결론지었다.

콘웰은 교황이 죽고 싶어 했다고 쓰기까지 했다. "의사를 부르는 것을 거부하고 자신이 간절히 원했던 종말을 다른 사람들이 무심히 대하도록 한 끝에 서거했다"는 것이다.

가장 최근에 전말을 조사한 사람은 58살의 스테파니아 팔라스카다. 기존의 조사들보다 훨씬 꼼꼼했다. 그는 의사의 비밀 의견서와 교황의 진단기록 등 기존에 전혀 거론되지 않던 문서들을 살펴보았다. 그는 요한 바오로 1세 시복위원회 부위원장이다.

시복을 조사하는 사람은 미묘한 입장에 처하는 것이 보통이다. 대상자가 성인이 될 수 있는 업적을 조사하는 것은 물론 일생에 대한 면밀한 조사를 통해 성인이 돼선 안되는 이유들도 찾아내야 하기 때문이다. 팔라스카는 다섯권에 달하는 요한 바오로 1세의 삶과 죽음에 대한 교황청의 기록을 작성했다.

그는 기존의 책들에 대해 '느와르 소설"이나 타블로이드 쓰레기라며 경멸했다. "20세기 들어 가장 오래 이어진 가짜 뉴스"라는 것이다.

바티칸은 최근 2017년 이탈리아어로 출간된 팔라스카의 연구서가 "최종적으로" 사건을 종결했다는 입장을 발표했다. 팔라스카는 요한 바오로 1세의 서거가 예상하지 못한, 막을 수 없었던 비극이라고 밝혔다.

팔라스카의 기록에 따르면 교황의 의료 기록에 이미 조짐이 나타나고 있었다. 그의 가족중 여러 명이 급사했고 3년 전에는 교황 본인도 눈에 혈전이 생겨 병원에 입원한 적이 있었다.

팔라스카는 자신의 책에서 암묵적으로 과거의 주장들을 비난했다. 특히 콘웰의 주 소식통이었던 사제 비서를 강력히 비판했다. 앞뒤 맞지 않는 설명을 내놓으면서 자신의 평판을 지키는데만 몰두한 믿을 수 없는 사람이라고 평했다.

그는 요한 바오로 1세가 더 오래 살았다면 역사에 남는 교황이 될 수  있었을 것이라면서 "갑작스런 서거가 그의 인생 전체를 삼켰다"고 말했다.

요한 바오로 1세 교황의 서거를 목격한 바티칸 내부자들 상당수가 이미 고인이 됐다. 살아 있는 사람들은 너무 늙었거나 말하기를 꺼린다. 따라서 주요 대목들에 대한 해석이 필요하다.

요한 바오로 1세의 죽음에 대한 태도를 예로 들면 콘웰은 교황이 의기소침했다는 것을 제대로 집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교황의 고향인 이탈리아 알프스 산속 마을 카날레 다고르도 사람들은 요한 바오로 1세는 몇년 동안이나 자신의 생명이 유한하다는 것을 받아 들이기 위해 죽음에 대해 언급하곤 했다고 말한다.

그가 자란 마을은 너무 가난해서 60세가 못돼 숨진 사람들이 많았다. 갓태어난 아기가 죽는 일도 흔했다. 교황의 친동생 한 사람도 갓태어나 숨졌고 형들 세 명도 그랬다. 죽은 형제들의 이름 모두가 알비노였고 교황 자신도 태어났을 때 탯줄이 목에 감겨 죽을 뻔했다는 것이다.

이제와서 이런 저런 주장들을 자세히 살펴보려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팔라스카의 책은 요한 바오로 1세의 서거에 대한 관심이 식은 뒤에 출판됐고 콘웰은 자신의 책이 대중의 인식을 "크게 바꾸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가 살해됐다고 말하는 것이 더 잘 먹히는 스토리라는 걸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요한 바오로 1세의 유품을 전시하는 카날레 다고르도의 박물관을 방문하는 순례자들은 교황이 범죄의 피해자라고 생각한다. 세월이 지나면서 교황이 살해됐다는 스토리는 영화 "대부 3"에까지 등장할 정도로 대중적이 됐다.

"사람들은 교황이 나쁜 사람들에 맞서던 순수한 사람이라고 말한다"고 박물관장 로리스 세라피니가 말했다.

박물관에는 교황의 서거와 관련된 전시항목이 많지 않다. 요한 바오로 1세의 시신을 수녀가 발견했으며 사망원인은 심장마비가 아닌 폐색전일 가능성이 크다는 문구만이 그의 서거를 전하고 있다.

세라피니 관장은 교황이 시복되면 그의 서거에 대한 관심이 다시 커질 수 있으며 책이 더 나올 지도 모르겠다면서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말했다.


◎공감언론 뉴시스 [email protected]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