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 하늘은 멀어도' 가수 금호동 별세, 향년 85
1960년대 인기 누린 美男·美聲의 가수
[서울=뉴시스] 금호동. (사진 = 박성서 대중음악 평론가 제공) 2024.02.19. [email protected] *재판매 및 DB 금지
19일 박성서 대중음악 평론가 등에 따르면, 금호동은 전날 오후 8시께 눈을 감았다.
1939년 일본에서 출생한 고인은 1945년 일곱 살 때 광복과 함께 귀국했다. 광주에서 유년 시절을 보낸 그는 1958년 광주와 서울 등지에서 출전한 경연대회에서 미성이 높은 평가를 받으며 줄줄이 입상했다.
특히 당시 오아시스레코드 사(社) 전속가수 모집 오디션에서 1등을 차지했다. 이 회사 전속가수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할 당시 오디션 심사위원이었던 작곡가 이재호가 금호동이라는 예명을 붙여줬다. 외모가 '호동왕자와 낙랑공주' 설화에 나오는 '호동왕자'와 닮았다는 이유였다. 나중에 호동의 한자를 호수 호(湖)와 동녘 동(東)으로 바꿨다.
1959년 이재호 작곡의 '신의주 사나이'로 데뷔했다. 이어 '눈물의 모자등'(작곡 박춘석), '봄 없는 청춘'(작곡 이재호), '호남선 밤열차'(작곡 이재호) 등을 발표한 후 1959년 육군 군악대에 입대했다.
1962년 전역해 작곡가 박춘석과 본격적인 콤비를 이루며 활동을 재개했다. 1963년 '산유화'를 시작으로 라디오 드라마 '현해탄아 잘있거라' 주제곡, 그리고 대표곡인 '고향하늘은 멀어도'를 발표하며 스타덤에 올랐다. 특히 '고향하늘은 멀어도'는 당시 동아방송 음악 프로그램에서 13주 연속 1위를 차지했다.
금호동의 또 다른 히트곡 '내일 또 만납시다'는 1964년 노필 감독에 의해 영화화되기도 했다. 금호동은 이 영화에 출연해 주제가 '내일 또 만납시다'와 '어둠 속의 젊음'을 불렀다.
1965년 들어 크고 작은 스캔들에 휘말리며 은퇴를 선언했다. 연예인 활동에 회의를 느끼고 가족이 있는 광주로 내려갔다. 박성서 평론가는 "광주에서 얼마간 떨어진 사찰 등에서 머물던 그를 컴백하게 만든 건 수백 통의 팬레터였다"고 짚었다.
[서울=뉴시스] 금호동 음반 커버. (사진 = 박성서 대중음악 평론가 제공) 2024.02.19. [email protected] *재판매 및 DB 금지
1960년대 말 국내 무대에 복귀했고, 1968년엔 본인이 작사·작곡한 '안녕하십니까'를 발표했다. 고인이 가수로서 녹음한 마지막 곡은 1972년 반야월 작사·나화랑 작곡의 '서울행진곡'과 '바다의 자장가'다.
박 평론가는 "금호동은 남자가수라면 저음이 강해야 한다는 통념을 깨고 품격 있는 고음을 구사했다"고 기억했다.
또한 금호동은 독학으로 역술과 침술 등을 배웠다. 1989년 한국역술협회 자격증을 취득해 원로가수 한명숙 등을 치료해주기도 했다.
최근까지 경기 김포시에 거주한 고인은 3개월 전 대장암을 발견했다. 수술, 항암 치료를 받는 중 복막염으로 전이됐다. 유족으로 1남1녀를 남겼다. 현재 미국에서 사는 아들 창우 씨는 뮤지컬 '겨울 나그네'에 출연하기도 했다. 빈소 김포아너스힐병원 장례식장 VIP3호, 발인 20일 오후 12시30분, 장지 김포시추모공원. 031-989-4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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