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블랙컨슈머와 헤어질 결심
[서울=뉴시스]김혜경 기자 = "(어디서 나왔는지도 모를) 머리카락이 있다고 보상·환불을 요구하는 경우는 비일비재하죠. 배달 시간이 조금 늦었다고 '별점 1점' 폭탄을 쏟아붓거나, 배달앱으로 주문해놓고 배달비를 떼먹는 사례도 허다해요."
국내 한 치킨 프랜차이즈 업체 관계자 A씨의 토로다. A씨는 가뜩이나 불황인데 블랙컨슈머들 때문에 가맹점주들이 골머리를 앓고 있다고 하소연했다.
그는 "제품에서 이물질이 나왔다고 신고해서 제품을 수거하러 가보면 이미 치킨을 다 먹었거나 문제가 된 제품을 주지 않는 경우도 많다"며 "최근에는 배달앱을 이용한 신흥 수법까지 더해지면서 점주들의 어려움이 가중되고 있다"고 전했다.
배달앱 주문시 배달비를 라이더에게 직접 결제하겠다고 체크한 뒤, 실제 라이더가 도착하면 집에 없는 척을 하는 블랙컨슈머들도 적지 않다는 게 A씨 전언이다.
바쁜 라이더는 다음 배달 일정이 있어 결국 제품을 문 앞에 두고 갈 수 밖에 없고, 배달비는 추후 점주에게 청구토록 하는 악질 수법이다.
블랙컨슈머란 악성이라는 뜻의 블랙(Black)과 소비자를 뜻하는 컨슈머(Consumer)의 합성어로, 고의로 회사에 악성 민원을 제기해 부당한 이익을 챙기려는 소비자를 뜻한다. 식품·외식 업계에서 블랙컨슈머들의 만행은 비단 어제 오늘만의 일은 아니다.
지난해 12월 서울 동작구 한 빵집에서는 한 여성이 구입한 샌드위치에 머리카락이 나왔다고 환불을 요구했으나, 자작극으로 판명나면서 논란이 일기도 했다. 이 여성이 자신의 머리카락을 뽑아 제품에 넣는 장면이 CCTV에 찍히면서 덜미가 잡혔다.
국내 유명 제과업체 관계자 B씨는 "정말 고충을 겪은 고객도 있겠지만, 블랙컨슈머들이 잘못이 없는 기업에까지 언론 제보를 하겠다고 협박하기도 한다"며 "언론에 보도되면 잘잘못을 떠나 기업·브랜드 이미지가 훼손될 수 있어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보상을 해주는 경우도 있다"고 했다.
B씨는 "수년 전 한 고객이 빵에서 손톱이 나와 치아가 손상됐다고 항의하며 수천만원을 요구하는 사건이 있었는데, 제조 과정에서 손톱이 들어간 것이 아님이 판명됐음에도 치료비를 제공한 적도 있다"고 씁쓸해 했다.
외식업계 대기업 뿐 아니라 자영업자들도 블랙컨슈머 횡포에 노출돼 있다. 자영업자들이 주로 이용하는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정당한 이유 없이 리뷰 점수를 낮게 책정하는 '별점 테러'를 당했다"고 하소연하는 글이 끊이지 않는다.
자영업자들은 악성 리뷰와 별점 테러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있지만 매출에서 배달 비중이 큰 만큼 배달 앱을 안 쓸 수도 없다. 고객이 별점 테러를 자진 삭제하도록 환불이나 보상 등 고객의 요구를 들어줄 수 밖에 없는 이유다.
정말 제품에 하자가 있다면 정당한 보상을 요구하는 것은 소비자의 당연한 권리다. 하지만 악의적 목적으로 없는 사실을 꾸미거나, 내용을 부풀려 부당한 민원을 제기하는 것은 범법 행위나 다름없다. 정작 실제 고충을 겪은 선의의 소비자들이 블랙컨슈머로 인해 피해를 입을 수 있다.
문제는 기업이나 자영업자들에게는 이에 대응할 수 있는 뾰족한 방도가 없다는 점이다. 배달 앱 측에서 악의적인 내용의 앱 리뷰를 삭제하거나 비공개(블라인드) 처리하는 등 블랙컨슈머 대응책을 마련하고 있지만, 문제가 되는 모든 리뷰를 걸러내는 근본적인 해결책은 되지 못하고 있다.
그나마 다행인 건 국회에서 블랙컨슈머와 '헤어질 결심'이 본격 논의되기 시작한 것이다. 국회 문화체육관광위 임오경 의원(더불어민주당 경기광명갑)은 지난해 9월 블랙컨슈머·악성댓글 등으로부터 고통받는 자영업자들을 보호하기 위한 '소비자기본법 일부개정법률안', 정보통신망 이용촉진 및 정보보호 등에 관한 법률안'을 각각 발의했다.
블랙컨슈머와 같은 불공정 소비행위를 근절하고, 건전한 생태계를 조성하기 위해서다. 국회에서 빠른 법안 통과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블랙컨슈머에 대해 법적 대응을 하는 경우도 있긴 하지만, 법정까지 가지 않고도 기업·자영업자들을 보호할 제도적 장치 마련도 시급하다. 소비자단체나 기업, 전문가 등이 참여하는 분쟁 해결 기구를 통한 처벌이나 합의도 대안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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