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키 큰 세 여자' 박정자·손숙 "7년 만에 한 무대, 우리는 전우"

김수연·박정자·손숙, 국립극단 연극 '키 큰 세 여자'
국립극단(예술감독 김윤철)의 가을마당 두 번째 작품인 미국 극작가 에드워드 올비(87)의 연극 '키 큰 세 여자'를 통해서다.
1999년 극단 여인극장의 공연 이후 16년 만에 국내 무대에 오르는 이 작품은 퓰리처상에 빛난다. 고집 세고 까다로운 한 여자의 인생을 재치있게 그린다.
서로의 과거이자 미래인 세 여인이 만나 첫사랑에서부터 결혼, 자식과의 절연에 이르기까지 다사다난했던 한 여자의 인생이 인간적으로 펼쳐진다.
박정자는 죽음을 앞두고 알츠하이머 증세로 기억을 잃어가는 90대 할머니 'A', 손숙은 A의 변덕에 능수능란하게 대처하는 50대 간병인 B 역할을 맡았다.
두 거목이 한 무대에 오르는 건 2008년 연극 '침향' 이후 처음이다. 2007년 '신의 아그네스'에도 함께 무대에 올랐는데 당시 1994년 '그 자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나' 이후 13년 만에 함께 하는 무대라 화제가 됐다. 앞서 1992년 '신의 아그네스'에도 함께 출연했다.
박정자는 15일 오전 서울 대학로 국립극단 연습실에서 열린 '키 큰 세 여자' 간담회에서 "손숙 선생과 나는 전우(戰友)"라고 웃었다.
"'신의 아그네스' '침향' '그 자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나' 등 4~5편에 함께 출연했죠. 전우라는 이야기도 했지만 배우가 소중해요. 너무 배우가 없어요. 많은 것 같은데 없죠. 무대 위에서 전쟁을 잘 치르려면 옆에 있는 전우들이 중요해요. '신의 아그네스'를 할 때 손숙 선생이이 용기를 줬죠. 굉장히 힘들었던 시간도 있었는데 감사하게 생각해요."
무대에서 같이 겨룰 수 있다는 것이 행운이라고 생각한다고 전했다. "누구하고 겨룬다는 건, 긴장감을 줘서 좋죠. 여전히 제게 긴장을 줄 수 있는 상대이고 겨룰 만한 상대라…있어준다는 것 자체가 감사합니다."
손숙은 고등학교 3학생 대학 입시 준비하는 것 처럼 연습이 고되다면서도 "오랜만에 박정자 선생님과 함께 하니 좋다"고 눈을 반짝였다. "열심히 하시니 안 따라갈 수 없죠. (연습) 중간에 모노드라마의 막이 올라가는 게 있어 대본을 못 외웠는데 선생님은 이미 다 외우셨더라고요. 선배가 옆에 있다는 것이 감사해요."
'동물원 이야기'(1959),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 하랴'(1962), '미묘한 균형'(1966)으로 찬사를 받은 올비는 퓰리처상을 세 번이나 수상했다. 토니상에서 최우수극작 및 평생공로상의 영예를 안기도 했다. 하지만 80년대 들어 한 동안 주춤하기도 했는데 '키 큰 세 여자'(1991)로 재기에 성공했다.
자신과 양어머니의 오랜 세월에 걸친 불행한 경험을 바탕으로 쓴 희곡이다. 제목 역시 키가 컸던 그의 양어머니에서 모티브를 따왔다.
하지만 부모자식 간의 갈등을 부각시키지는 않는다. 죽음을 앞둔 한 노인의 모습을 통해 '인생은 죽음이 있기에 아름답고 소중하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소멸해가는 동시에 파편화된 자신의 기억으로 인해 변덕과 심술이 끊이지 않는 90대 노인을 50대와 20대 여인이 간병하고, 대화하고, 다투는 단순한 구조의 이야기인 1막은 '리얼리즘' 성향이 짙다. 그러나 2막에서 50대와 20대 여인이 90대 노인의 분신으로 등장하는 '표현주의'로 승화한다.
박정자는 극 중 이름 대신 A로 불리는 것이 좋다고 했다. "우리 모두(관객)가 다 A가 될 수 있고 또는 B가, C가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공통 분모를 가지고 있어 안도감이 든다"며 웃었다.

김수연·손숙·박정자, 국립극단 연극 '키 큰 세 여자'
"이 작품을 알고는 있었지만 아마 대본을 깊게 봤으며 안 했을 거예요(웃음). 하면 할수록 어렵죠. 손 선생님도 느낄 겁니다. 그러나 인생을 사는데 몇 개의 산도 넘어야 하고 몇 개의 강도 건너야 하죠. 이번에 큰 산을 만났어요."
국립극단의 젊은 시즌 단원인 김수연이 20대 C를 연기한다. 그녀는 박정자·손숙과 함께 연기 연습을 하면서 놀라운 일이 많다고 했다.
"두 분이 서로에 대한 신뢰가 깊어요. 서로 안 계실 때 오히려 잘 챙겨주시죠. 그리고 몸소 직접 보여주세요. 연습 시작 한 시간 전에 일찍 오셔서 항상 연습을 하시고 대본을 보시죠. 그런 모습을 보면서 배우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를 깨닫고 있어요."
박정자와 손숙은 포스터 속 김수연을 보며 "참 젊다"면서도 자신들의 현재를 긍정했다. 박정자는 "20대로 가고 싶지는 않어요. 인생의 360도 각도에서 바라보는 B의 50대가 의미가 있죠"라고 했다. "90의 할머니는 가장 행복한 순간이에요. 이 작품이 아니면 지난 삶을 돌아볼 수 있었을까라는 생각도 들죠. 다 끝나는 순간, 죽음을 이야기하는 것인데 행복하게 이야기를 하죠."
극 중에서 50대를 연기하는 손숙도 "인생이 산을 오르내리는 일이라면 쉰살은 그 정점에 있죠. 근데 쉰에는 그걸 몰라요."
박정자와 손숙은 지난달 25일 1세대 무대미술가 이병복(88)의 구술을 채록한 '우리가 이래서 사는가 보다' 출간을 기념하는 자리에서 함께 낭독 공연을 하는 등 쉰살이라는 정점을 넘어서도 연극계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이병복처럼 대한민국에서 소수 장르인 연극, 그리고 소외될 수밖에 없는 '여성' 연극인으로서 살아 왔지만 '여성'이라는 수식은 인식을 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 더 특기할 만하다.
박정자는 "우리는 인간을 이야기하는 거지요. 굳이 여자, 남자를 가리지 않아요"라고 강조했다. 손숙 역시 "저 역시 여성이라서 차별을 받았다는 건 없어요. 방송을 하면서도 예전보다 (여성의 위치가) 많이 발전했다고 느낀다"고 했다. "아직은 더 가야겠지만 여성으로 사는 것이 행복하고 좋아요."
세련된 무대 미학을 추구하는 이병훈 연출은 "주인공이 이병복 선생님이 살아온 여정과 비슷하다. 키가 큰 점도 비슷하고"라면서도 "남자, 여자를 떠나 보편적이 이야기"라고 소개했다.
그는 "죽음, 삶에 대한 이야기라 우울할 수 있는데 생명력이 넘치고 유머도 많죠"라며 "비극적 코미디라고 할 수 있죠. 재미가 있는 가운데 깊은 생각을 해볼 수 있는 작품"이라고 부연했다. "죽음이 삶에게 보내는 치유의 메시지라고 할 수 있죠. 죽음이라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화해시키는 묘한 힘이 있어요."
국립극단이 새로 표방하는 '배우중심 연극'의 첫 번째 작품이기도 하다. 김윤철 국립극단 예술감독은 "현대 연극이 배우의 존재를 위축시키는 경우가 있어서 배우 중심성을 회복하고 싶었다"며 "어떤 배우로 시작할 수 있을까 고민하다 박정자·손숙 선생님을 떠올리게 됐다"고 전했다.
10월 3~25일 명동예술극장. 아들 허민형. 무대 박동우, 조명 이동진, 의상 송은주, 드라마투르그 이은기. 17세 이상 관람가. 120분(휴식 포함). 2만~5만원. 국립극단. 1644-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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