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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연배의 이야기와 함께하는 와인]내일 종말이 와도 포도나무를…

등록 2022.10.15 06:00:00수정 2022.10.15 10:4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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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빌리시(조지아)=신화/뉴시스] 조지아 북부 카헤티의 한 포도밭에서 농부가 포도를 수확하고 있다. 2020년 10월3일에 촬영한 사진. 2022.10.15 photo@newsis.com

[트빌리시(조지아)=신화/뉴시스] 조지아 북부 카헤티의 한 포도밭에서 농부가 포도를 수확하고 있다. 2020년 10월3일에 촬영한 사진. 2022.10.15 [email protected]

[서울=뉴시스]  6600만년 전 어느 날, 지름 17㎞의 혜성이 초속 12㎞로 다가와 멕시코 유카탄 반도를 직격한다. 일본 나카사키에 떨어진 핵폭탄 47억개에 맞먹는 파괴력을 가진 이 충돌로 지름 150㎞· 깊이 20㎞의 거대한 구덩이가 생겼고, 대규모 화재와 쓰나미가 발생했다. 하늘에서는 증발한 암석이 식어 만들어진 유리 결정체와 함께 파편이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기화된 황과 재는 햇빛을 차단해 지구를 얼어붙게 했다. 이로 인해 1억6000만년 동안 지구를 지배했던 공룡을 비롯한 지구 생물의 75%가 사라진다. 지구 생물체 40여억년의 역사 중 다섯 번째 대멸종이다.

이 대멸종에서 인류의 조상인 영장류는 살아남았다. 그리고 포도나무도 살아남았다.

2013년 미국 플로리다 자연사 박물관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6600만년 전 포도 화석을 공개했다. 인도 중부에서 발굴된 것인데, 유럽과 북미 대륙에서 발견된 것(5500만년~5900만년 전)보다 1000만년 정도 앞선다. 적어도 5500만년 전에 포도나무가 이미 지구상에 광범위하게 분포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인도가 속하는 인도판 지각은 9000만년 전인 백악기 후기엔 독립된 섬으로 존재했으나 약 5000만년 전 유라시아판과 충돌하기 시작해 히말라야 산맥을 만들었고, 1000만년 전에는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유라시아 대륙에 완전히 통합된다. 아프리카와 남미 대륙은 1억5000만년 전 쥐라기 시대에 분리되기 시작했다. 페루와 파나마에서 출토된 2000만년 전 화석에 남아있는 포도 품종은 아프리카와 동남아 지역의 일부 자생 품종과 동일한 DNA를 지니고 있다. 이는 포도의 역사가 백악기(1억4500만년~6600만년 전) 이전으로 거슬러 오를 수도 있음을 시사한다. 과일 등 대부분의 속씨 식물은 백악기에 출현했으나 그 바로 전인 쥐라기에도 흔적이 나타난다.

처음 인류는 포도를 식용으로 채집했다. 79만년 전 화덕에서 발견된 포도씨나 프랑스의 테라 아마타 지역에서 발굴된 40만년 전 하이델베르크인의 유적이 이를 보여준다. 그러나 나무를 감고 올라간 야생 포도 덩굴에서 포도를 채취하기가 쉽지 않자, 인류는 포도를 직접 재배한다. 인류가 최초로 포도를 재배한 지역은 중앙아시아의 남부 코카서스 지역(Transcaucasia)이다. 현재 조지아,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이 위치한 이 지역은 와인의 역사가 시작된 곳이기도 하다. 와인을 양조하기 위해서 포도를 재배했다기보다는 다량의 포도를 보다 쉽게 확보하는 과정에서 양조가 시작됐다.

포도의 품종은 크게 유럽종인 ‘비니페라’(Vitis Vinifera)와 북미종인 ‘라브루스카’(Vitis Labrusca) 및 아시아종으로 나뉜다. 중국에서도 2600만년 전 자생 포도의 화석이 발견됐다. 인도가 유라시아 지역에 통합되기 전에도 유럽지역에 야생 포도가 존재하고 있었으나 남부 코카서스 지역에서 처음 와인을 양조한 품종은 비니페라다. 카베르네 쇼비뇽, 피노 누아르, 말벡, 산지오베제, 샤르도네, 리즐링 등 유럽을 비롯한 전 세계 와인용 포도의 95% 이상이 이 지역에서 시작된 비니페라의 유전적인 변종이다.

현재 지구상에 존재하는 포도의 품종은 1만 3000여 종에 이른다. 이 중 양조용 포도만 1만170종이다. 하지만 실제로 양조에 사용되는 것은 300여종 정도이고 이중에서도 30여종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전 세계 포도 생산량 기준으로는 57%가 와인용이고, 식용이 36%, 7%가 건포도용이다. 현재 우리가 마시고 있는 거의 모든 와인은 남부 코카시스 지역이 기원이다.

2017년 캐나다 토론토 대학과 조지아 국립박물관 공동 연구팀은 조지아의 수도 트빌리시에서 50㎞ 떨어진 유적지에서 양조장 터와 와인을 담은 토기 등 8000년 전 인류가 최초로 와인을 담근 증거를 발굴했다. 출토된 8개의 항아리에는 와인의 화학적 성분이 남아 있었다. 성분 분석결과 와인의 품종은 비니페라였다. 오늘날 오렌지 와인처럼 포도를 압착해 ‘차차’(chacha,포도 껍질·씨·줄기)와 함께 크베브리라 불리는 토기에 넣어 5~6개월 동안 숙성했다. 현재 조지아에만 525종의 고유한 포도 품종이 있다.

수천년 동안 내려온 조지아의 전통적인 크베브리 양조법은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유산, 세계무형문화유산, 세계기록유산 등에 등재돼 있다. 와인의 양조에 있어 토기를 굽는 일과 양조가 끝난 후 토기를 세척하는 일도 전문적인 기술과 경험이 필요해 장인의 영역에 속했다. 와인 저장실은 가장 신성한 곳으로 여겨진다. 조지아인들은 전통에 따라 잔치에서 와인 건배를 제의하는 사람을 ‘타마다’(tamada)라고 부르고, 포도나무를 ‘생명나무’라고 표현한다. 모든 것에는 시작이 있다.

▲와인 칼럼니스트·경영학 박사·딜리버리N 대표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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