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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위기의 상징 잔술, 그마저도 사라진다…부자촌은 지금[현장]

등록 2024.05.03 08:00:00수정 2024.05.03 08:4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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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촌, 해방 전부터 저렴한 먹거리 문화 이어와

노포 주인 "가격 올리고 싶지만 더 안 올까봐 고민"

전문가 "1천원 잔술 문화 감소현상, 생계위협의 증거"

[서울=뉴시스]오정우 기자 = 서울 종로구 탑골공원 부자촌의 노포 '부자촌'에서 1000원짜리 잔술을 마시는 이병희씨. 2024.05.02. friend@newsis.com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뉴시스]오정우 기자 = 서울 종로구 탑골공원 부자촌의 노포 '부자촌'에서 1000원짜리 잔술을 마시는 이병희씨. 2024.05.02. [email protected]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뉴시스] 오정우 기자 = "매일 먹으러 오지. 이게 유일한 삶의 낙이야."

칠순을 넘긴 조승규씨는 '잔술 막걸리'를 마시러 매일같이 부자촌에 있는 노포 '부자촌'에 드나든다. 막걸리 한 사발을 들이켠 그는 연거푸 강냉이를 퍼 곧장 입에 털어넣었다. 조씨는 단돈 '1000원'으로 매일 '일용할 점심'을 해결한다.

조씨의 '잔술 막걸리' 추억은 20년 전부터다. 1966년 파고다 극장이 서울 종로구 탑골공원 근처에서 베일을 벗은 때가 기억난다는 그는 20년 전에 '부자촌'에 터전을 잡고 연일 잔술을 마신다.

그는 "1000원에 술과 안주를 먹을 수 있다"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식당에서 4000~5000원에 달하는 막걸리와 밥을 추가로 먹는 대신 이곳에서 저렴한 값에 허기를 달랠 수 있다고 했다.

이병희(63)씨는 조씨를 이날 처음 만났지만 '도원결의'를 맺어 술 한 잔을 추가로 샀다. 술을 산 그는 '형님'으로 불리며 어느새 둘은 호형호제하고 있었다. 이들은 잔술을 같이 마신 후 담배를 건네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이씨는 잔술을 두고 "'밥'이기도 하지만 여럿이서 술친구도 하고 얻어먹을 때도 있어서 좋다"고 했다.
[서울=뉴시스]오정우 기자 = 부자촌 대표 서민문화인 1000원짜리 잔술 막걸리가 사라지는 추세다. 사진은 잔술을 따르는 가게 주인 문정술씨. 2024.05.02. friend@newsis.com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뉴시스]오정우 기자 = 부자촌 대표 서민문화인 1000원짜리 잔술 막걸리가 사라지는 추세다. 사진은 잔술을 따르는 가게 주인 문정술씨. 2024.05.02. [email protected] *재판매 및 DB 금지

종로는 조선시대부터 번화가이자 중심 상권으로 통했다. '부자촌'이라는 별칭도 거기에서 유래됐다는 설이 있다. 이에 비해 탑골공원 인근인 이곳은 과거부터 현재까지 서민들을 대상으로 먹거리를 저렴하게 판매해오고 있다.

그러다 1980년대 탑골공원이 무료공원으로 개방되고, 1990년대부터 이 인근이 서울의 대표적인 노인 쉼터가 된 뒤로는 우리나라에서 물가 인상 속도가 가장 더딘 곳이 됐다.

부자촌의 대표 '서민문화'인 '1000원짜리 잔술'은 과거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먹구름이 짙어지는 모양새다. 코로나19때부터 이어진 고물가 현상이 좀처럼 꺾이지 않아서다.

실제 통계청이 지난달 공개한 '2024년 3월 소비자물가동향'을 살펴보면 3월 소비자물가는 전년 같은 달 대비 3.1% 상승했다.

덩달아 탁주에 붙는 '주세'도 막걸리 가격을 높이는 요인이다.

국세법령정보시스템에 따르면 2020년 1월~2021년 2월 ℓ(리터)당 41.7원였던 주세는 꾸준히 우상향해 2023년 4월 리터당 44.4원을 기록했다. 원룟값·유통비 등 상승에 더해 불어나는 주세는 자연스레 막걸리 출고가 인상으로 이어졌다.

이에 최근 부자촌에서는 1000원짜리 잔술 가게가 아예 문을 닫거나 막걸리 한 병을 파는 문화로 바뀌는 분위기다. 손해가 크기 때문이라고 한다. 남은 가게들은 금액을 올리지 못하는 대신 잔 크기를 손 보기도 했다.

이날 뉴시스 취재 결과 부자촌에서 잔술을 파는 가게는 단 한 곳이었다. 이마저도 낮 12시부터 오후 1시까지 5명도 안 되는 노인만이 꼬깃한 1000원을 건넬 뿐이었다.

부자촌에서 20년 이상 잔술을 판 문정술(72)씨는 "오전 7시부터 오후 6시까지 팔아도 하루에 6만원도 못 번다"고 하소연했다.

고공행진하는 물가 탓에 문씨는 잔술 가격을 올려야할지 저울질하는 모습이었다. 그는 "가격을 올리려고 했는데 100원만 올려도 비싸다며 노인들이 안 온다"며 울상을 지었다.
[서울=뉴시스]오정우 기자 = 서울 동대문구 풍물시장에도 1000원짜리 잔술을 파는 가게는 단 한 곳뿐이었다. 2500원짜리 토스트나 3000원짜리 팥빙수를 먹고 허기를 달래는 이들도 있었다. 2024.05.02. friend@newsis.com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뉴시스]오정우 기자 = 서울 동대문구 풍물시장에도 1000원짜리 잔술을 파는 가게는 단 한 곳뿐이었다. 2500원짜리 토스트나 3000원짜리 팥빙수를 먹고 허기를 달래는 이들도 있었다. 2024.05.02. [email protected] *재판매 및 DB 금지



이같은 경고음은 부자촌에서만 울리는 건 아니었다. 이날 방문한 서울 동대문구 벼룩시장·풍물시장에서 잔술을 파는 가게 역시 부자촌처럼 한 곳 뿐이었다. 옆집에서 2500원짜리 토스트를 파는 사장 임선상(68)씨는 이마저도 주말에만 연다고 귀띔했다.

16년간 이곳에서 장사를 해왔다는 임씨는 "2500원짜리 토스트를 팔면 700원 남는다"며 충혈된 눈을 한 차례 팔로 닦았다. 그는 "여기에서 (판매가를) 한번 올리면 그게 영원히 올라가는 거니까 일단 올리지는 않는 거"라고 했다. 그는 하루에 많이 팔아야 10만원을 번다고 했다.

벼룩시장에서 20년 동안 장사한 김정현(70)씨도 "차라리 코로나19때가 낫다"며 "요즘 물가도 비싸고 돈이 없어서 노인 분들이 잘 안 온다"고 했다.

전문가들은 부자촌 잔술 문화가 사라지는 현상을 '생계위협'의 증거라고 진단했다.

박승희 전 성균관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잔술은 가난한 사람들이 기분 전환할 수 있을 뿐더러 영양 섭취도 되는 '주식'"이라며 잔술 문화가 사라지는 현상을 "물가가 올라 생계가 위협받는 증거"로 진단했다.

정순둘 이화여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도 "어디 가서 쉽게 1000원 한 장 내고 먹을 수 있는 문화는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라며 "잔술 문화가 없어지면 생계 위협과 함께 어려운 분들이 마음을 위로받을 수 없을 것"이라고 했다. 그는 이 같은 현상이 장기화하면 복지 당국 차원에서 프로그램을 통해 대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공감언론 뉴시스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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