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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중전쟁]③'자주성' 키우는 유럽…美·中 선택 압력 거부한다

등록 2021.09.04 08:00:00수정 2021.09.04 08:4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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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뤼셀=AP/뉴시스]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우르줄라 폰 데어 라이엔 EU 집행위원장이 6월 15일(현지시간) 미국-EU 정상회의에서 인사하고 있다. 2021.6.15.

[런던=뉴시스]이지예 기자 = "유럽연합(EU)은 자주적인 세력이자 우리 선택의 주인, 우리 운명의 주인이다"(샤를 미셸 EU 정상회의 상임의장)

"우리 스스로의 이익과 가치를 지키고 방어해야 한다. 외부의 기대나 압력이 아니라 EU로서 우리가 원하고 필요한 것을 나침반으로 삼아야 한다"(호세프 보렐 EU 외교·안보정책 고위대표)
美·中 사이서 '유럽의 이익' 위한 '전략적 자주성' 키우기
미국과 중국의 패권 경쟁이 심화하면서 EU의 고민도 깊어지고 있다. 유럽은 미국과 집단 방위체제 나토(NATO·북대서양조약기구)로 엮인 동맹이자 중국과는 서로 핵심 교역 파트너다. 미국이 이끄는 대중 견제 전선에 완전히 합류하기엔 중국과의 협력 관계를 포기할 수 없고, 중국을 포용하자니 갈수록 심해지는 비민주적 행태가 우려된다.  

이런 국면에서 EU는 '전략적 자주성'(strategic autonomy) 강화를 생존 전략으로 주목하고 있다. 유럽의 이익이 미국이나 중국의 국익과 동일할 수 없으므로 외부 압력에 흔들리지 않고 실익을 챙기려면 외교, 국방, 산업, 기술 측면에서 스스로의 힘을 키워야 한다는 개념이다. 한국에선 '전략적 자율성', '전략적 자립'이라고도 번역한다.

최근 아프가니스탄 철수 과정에서 노출된 미국과 유럽국들의 불협화음은 이 같은 논의에 더욱 불을 붙였다. 나탈리 루아조 유럽의회 안보국방 소위원장은 애틀랜틱카운슬 기고문에서 "지금 벌어지는 일은 유럽의 전략적 자주성 강화를 촉진할 뿐"이라며 "동맹들과 협력을 계속하되 언제든 필요하다면 자율적으로 움직이기 위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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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AP/뉴시스]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2020년 12월 30일 베이징에서 유럽연합(EU) 지도부와 화상회의를 하면서 손을 흔들고 있다. 2020.12.31.


"화성에서 온 미국· 금성에서 온 유럽"…애증의 동맹
자유 민주주의 국제 질서를 함께 이끌어 온 미국과 유럽은 역사·문화·이념적으로 뗄 수 없는 관계다. 2차 세계대전으로 망가진 유럽은 미국의 '마셜 플랜'(대규모 대외 원조사업)을 발판삼아 다시 일어섰다. 1949년 창립된 북미와 유럽의 나토 동맹은 냉전 시대 공산주의 확대를 저지하기 위해 함께 싸웠고 소련과 공산권 몰락을 이끌어냈다. 현재 나토는 미국과 캐나다 및 유럽 28개국을 품은 세계 최대 군사동맹이다.

그러나 미국과 유럽 사이엔 사실 미묘한 신경전이 끊이지 않고 있다. 미국이 자유주의 동맹을 주도해 전후 패권국으로 자리매김한 반면 유럽은 미국에 종속되는 상황을 경계하며 동맹 내부의 세력 균형을 추구했다. 영국과 프랑스가 독자적으로 핵무기를 개발하고 나선 데에도 이런 배경이 있었다. 1990년대 냉전이 종식되고 EU가 출범하면서 미국을 따라가는 것만이 아닌 유럽만의 정체성이 필요하다는 문제 의식은 더욱 커졌다.

미국이 초강대국으로서 '하드 파워'를 종종 일방적으로 활용하는 반면 EU는 다자적 접근법과 비군사적 수단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발전했다. 2001년 9·11 테러를 계기로 한 이라크 전쟁은 둘의 차이를 극명하게 보여줬다. 당시 독일, 프랑스 등 여러 유럽 동맹이 무기사찰 같은 외교적 해법을 우선하자고 주장했지만 미국은 독단적인 군사행동을 개시했다. 로버트 케이건 미국 브루킹스연구소 선임 연구원은 이런 갈등을 두고 "미국인은 화성에서 유럽인은 금성에서 왔다"고 표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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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말베(캐나다 퀘벡주)=AP/뉴시스】2018년 6월 9일(현지시간) 캐나다에서 열린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에서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맨 오른쪽 하단)과 다른 정상들이 대화하고 있다. 미국과 동맹들 사이 신경전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진이다. 2018.6.10


"미국 리더십에 중독"…유럽, 美 우선순위 변화에 발칵
시대가 변하면서 미국과 EU의 갈등 양상은 더욱 뚜렷해졌다. 미국은 9·11 테러와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를 연달아 겪은 뒤 대외 관여보다는 국가 재건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동시에 중국이 새로운 패권국으로 떠오르는 기미를 감지하고 외교안보 전략의 중심축을 아시아로 옮겨갔다. 미국은 이런 계획을 원활하게 추진하기 위해 유럽의 부유한 동맹들이 더 많은 짐을 나눠지길 요구했다. 유럽이 미국의 우선순위에서 밀려난 모양새다.

최근 아프간 사태는 조 바이든 대통령 취임으로 미국의 리더십 복원을 기대한 유럽을 다시 각성시켰다. 유럽국들은 아프간 정세 관리와 안전한 철수를 위해 조건부 철군과 시한 연기 필요성을 제기했지만 미국은 원안대로 완전 철수를 밀어붙였다. 미군을 대체할 방도가 없는 나토 동맹들은 미국이 자국 우선순위를 강요한다고 볼멘소리를 하면서도 이런 결정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야프 데 후프 셰퍼 전 나토 사무총장은 "유럽은 미국 리더십에 중독돼 있었다"면서 미국의 관심이 아시아로 이동하고 있는만큼 유럽이 자체적 국방력을 강화할 필요성이 더욱 커졌다고 촉구했다. 미국과 유럽은 70년 사이 안보 여건이 완전히 달라졌음을 이해하고 '나토2030', '신 대서양의제'(NTA) 등의 프로젝트를 통해 '동맹 개혁'을 추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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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뤼셀=AP/뉴시스]나토 회원국 정상들이 6월 14일(현지시간) 나토 본부에서 정상회의에 앞서 단체 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2021.6.14.


중국은 '체제·경제적 경쟁자'이자 '협력·협상 파트너'
유럽은 중국을 다각적인 측면에서 바라본다. EU는 2019년부터 중국을 '체제적 라이벌', '경제적 경쟁자'이자 '협력 파트너', '협상 파트너'로 규정하고 있다. EU는 중국의 인권 논란과 비시장 관행에 대해 꾸준히 문제를 제기하면서도 관세 전쟁 같은 미국의 대중 강공책에는 장단을 맞추지 않았다. 기후변화 등 공동의 과제를 다루려면 제2의 경제대국으로 성장한 중국을 배제할 수 없다는 입장이기도 하다.

중국과 유럽의 관계는 중국의 경제력 성장과 국제 교역 확대에 발맞춰 빠르게 발전했다. 2019년 기준 중국은 미국에 이어 EU의 두 번째로 큰 무역 상대국이고, EU는 중국에 제1의 무역 파트너다. 양측은 파리 기후협약, 세계무역기구(WTO) 체제, 이란 핵합의 등 주요 다자협약을 함께 지지하기로 했다. 또 연례 정상회의와 고위급 경제 대화를 정기적으로 개최하며 소통을 지속하고 있다. 이런 대화는 코로나19 사태 동안에도 중단 없이 이어졌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중국의 사례는 비민주 국가도 경제적으로 성공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자유 민주주의에 중대한 도전"이라면서도 "중국은 이제 글로벌 행위자다. 우리는 경제 협력과 기후변화 대응을 위한 파트너지만 매우 다른 정치 체계를 가진 경쟁자다. 서로 대화하지 않는다는 건 나쁜 생각"이라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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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신화/뉴시스]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2020년 9월 14일 중국 베이징에서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시계방향),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유럽연합(EU) 집행위원장, 샤를 미셸 EU 정상회의 상임의장 등과 화상 정상회의를 진행하고 있다. 2020.09.15.


거칠어 지는 중국에 난감…EU "우리가 너무 순진했다"
그러나 중국의 행보가 점점 거칠어지면서 '우리가 너무 순진했다'는 자성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중국은 '일대일로'(육해상 실크로드) 사업의 일환으로 동·중유럽 개발도상국들에 인프라(사회기반시설) 투자를 확대하고 있다. 코로나19가 확산하자 마스크 등 방역 물품도 대거 풀었는데 이는 유럽 내 중국의 입김 확대라는 우려를 낳았다. EU는 지난해 화웨이 등 중국 통신장비 업체들의 스파이 위협이 대두되자 부랴부랴 5세대 이동통신(5G) 공급업체 다각화를 권고하기도 했다.

인권 문제를 둘러싼 논란도 갈수록 첨예한 양상이다. EU는 지난 3월 신장 위구르 자치구 소수민족 탄압을 이유로 1989년 톈안먼(천안문) 사태 이후 30년만에 처음으로 중국에 인권 관련 제재를 부과했다. 이런 갈등은 경제 협력에도 장애물이다. EU 집행위는 작년 12월 중국과 상호 시장 접근성을 대폭 확대하는 '포괄적투자협정'(CAI) 체결을 합의했다. 협상을 시작한지 무려 7년만이었다. 그러나 EU 입법부인 유럽의회가 비준을 보류하면서 발효 여부가 미궁에 빠졌다.

미셸 EU 의장은 "중국과의 관여와 협력은 기회이자 필요한 일이지만 우리가 같은 가치와 정치 체계, 다자주의에 대한 접근법을 공유하지 않는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고 강조해 왔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의료장비 등에 대한 유럽의 과도한 대중 의존도를 지적하면서 유럽이 국내 핵심 산업 투자를 통해 '경제적 주권'을 강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EU는 대중 전략 재검토 필요성을 점검하기 위해 올해 하반기 대중 관계 분석 보고서를 낼 예정이라고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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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AP/뉴시스】2019년 3월 26일 프랑스를 방문 중인 시진핑(왼쪽 두 번째) 중국 국가 주석이 장클로드 융커 전 EU 집행위원장(왼쪽부터),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와 공동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2019.03.26. 


안보·핵심산업 대외 의존도 축소…협력관계 다변화 추진
미국과 중국 모두로부터 치이는 상황이 심해지자 EU가 커내든 카드가 '전략적 자주성' 키우기다. 안보, 기술, 핵심 산업의 대외 의존도를 줄여 자율적 역량을 강화하고 협력 대상을 다변화한다는 게 골자다. 이탈리아 국제문제연구소(IAI)는 "한 쪽을 선택한다는 것은 선택한 쪽에 더욱 의존하게 된다는 의미"라면서 전략적 자율성을 바탕으로 유럽의 이익에 기반한 사안별 판단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방위 측면에서 최대 화두는 나토군과 별도의 '유럽군' 창설이다. EU는 2017년부터 회원국 국방력 강화와 연구개발 협력을 위해 항구적 안보협력체제(PESCO), 유럽방위기금(EDF), 국방 공동연례검토(CARD)를 운영 중이다. 경제·산업 방면에선 ▲ 유로화의 국제거래 사용 확대 ▲ 핵심 품목의 공급망 회복력 확충 ▲ 유럽 기업에 대한 외국인직접투자(FDI) 심사 강화를 추진하고 있다. 유럽식 차세대 데이터 인프라 구축을 위한 '가이아-X' 프로젝트를 발족하기도 했다.

EU는 동시에 국제사회 다양한 일원이 협력하는 다자체계 수호도 강조한다. 한국도 주요 협력 파트너다. EU는 입장이 유사한 나라들과 관계 강화를 강조하면서 한국, 일본, 인도, 호주, 뉴질랜드, 아세안(ASEAN· 동남아시아국가연합)을 협력 확대 대상으로 지목했다. 문재인 대통령과 EU 지도부는 작년 6월 화상 정상회담에서 상호 전략적 동반자 관계를 발전시키면서 WTO, 세계보건기구(WHO), 파리 기후협약 등을 통한 다자 협력을 지지한다는 데 공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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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월(영국)=뉴시스]박영태 기자 = 문재인 대통령이 6월 12일(현지시간) 영국 콘월 카비스베이 양자회담장에서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오른쪽) EU 집행위원장, 샤를 미셸(왼쪽) EU 정상회의 상임의장과 한-EU 정상회담을 하고 있다. 2021.06.13. since1999@newsis.com


'자주성의 덫' 경계감도…독일·프랑스 리더십 교체도 변수
유럽이 '전략적 자주성'을 어느 정도로 실현시킬 수 있을지는 불투명하다. 대미 안보 의존도가 워낙 커서다. 미국은 본부 유지, 공동 안보 투자, 연합 군사작전 등에 쓰이는 나토 예산의 22%를 기여해 왔다. 이와 별개로 나토 회원국들은 방위비를 각국 국내총생산(GPD)의 2% 수준으로 늘리기로 약속했다. 단계적 증액 추세이긴 하지만 현재 이 기준을 충족하는 곳은 미국 등 10개국뿐이다. 때문에 유럽의 독자적 움직임이 실익 없이 나토 동맹을 훼손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높다.

자립에 대한 집착이 과해지면 유럽이 보호주의로 기울 수 있다는 경계감도 나온다. 그동안 EU는 세계 최대의 정치·경제적 통합체로서 자유 무역과 다자 협력을 앞장서 지지해 왔다. 그러나 '경제적 주권' 확보의 일환으로 최근 생산 라인의 '온쇼어링'(국내 이전)과 '니어쇼어링'(인접국 이전)에 관한 언급이 늘고 있다. 카네기국제평화재단 유럽센터는 EU가 '자주성의 덫'에 빠지면 오히려 자유주의 가치를 훼손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EU의 양대산맥 격인 독일과 프랑스의 리더십 교체 여부도 변수다. 16년간 재임하며 유럽의 '기둥' 역할을 한 메르켈 독일 총리가 올해 퇴임한다. 9월 독일 총선에서는 집권 기독민주당이 사회민주당이나 녹색당에 패해 정권 교체가 이뤄질 가능성이 제기된다. 프랑스는 내년 4월 대선을 앞뒀다. 마크롱 대통령의 재선 도전이 예상되는 가운데 유력 극우 정치인 마린 르 펜의 기세도 심상치 않다. 코로나19 극복과 아프간 난민 위기, 반중 정서 심화 등이 주목할 요인이다.


◎공감언론 뉴시스 ez@news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