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인 만주망명 110주년]③여성독립운동가 애환, 한글가사에
이상룡 선생 부인 김우락 여사 '해도교거사'
권동만 선생 부인 김우모 여사 '눈물뿌린 이별가'
"독립운동가 가족의 삶과 애환, 생생하게 전달"

'해도교거사' (사진=이재업 독도재단 이사장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14일 한국국학진흥원에 따르면 김우락(金宇洛, 1854~1933) 여사가 지은 '해도교거사'라는 한글가사가 전한다.
김우락 여사는 1911년 만주망명의 주역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낸 석주 이상룡의 아내이자 백하 김대락의 누이동생이다.
이 가사는 김우락 여사가 만주망명 이후 서간도에 정착해 지었다.
자신의 성장 과정과 혼인 이후의 삶, 남편의 구국운동 상황, 만주 망명과 정착 이후 삶의 이야기 등 자신의 일생 경력을 한글로 기록했다.
제목은 한글이지만 '해도'(海島)는 (서)간도를 의미하고, '교거'(僑居)는 임시거주를 의미한다.
가사 말미에는 '신해년 국화절에 단풍은 비단 같고 찬바람은 소슬하니 원객(遠客)의 시름일세 / 심심하고 수란한 중에 심신이 어지러워 자리에 혼자 누워 공부 없는 짧은 문필로 자신의 경력을 기록하니 남이 볼까 부끄럽소'라는 구절이 있다.
이 구절로 볼 때 기록 시기는 대략 음력 1911년 9월 9일(양력 10월 29일) 또는 그 이후로 추정된다.
특히 김우락 여사는 예순의 노쇠한 나이에다 여성 신분이지만 영웅 열사를 모아 조국 독립과 국권회복을 이루고 싶은 소망을 담기도 했다.
'어와 이 내 몸이 청춘의 어린 시절 어제였는데 / 육십의 나이 늦었구나, 이 몸 어찌하여 다시 젊어져 / 영웅 열사 모은다면 독립국권이 쉬울 것이니 / 아무리 여자라도 이 때 한 번 쾌히 치욕을 씻어내고자 하네'
독립운동을 위해 평생 몸 바친 석주 선생의 아내로서 그 기상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김우모(金羽模, 1874~1965) 여사가 1934년 만주로 망명한 두 아들과 함께 살기 위해 1940년 망명길에 오르면서 지은 '눈물뿌린 이별가'라는 가사도 남아 있다.
김우모 여사는 안동 서후면 금계마을 의성김씨 김세락의 딸로, 가일마을 안동권씨 권준희의 며느리이자 권동만의 아내이다. 친정은 독립운동 명문가로 유명하다.

'눈물뿌린 이별가' (사진=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둘째오빠 김원식은 만주에서 서로군정서, 대한통의부, 정의부 등에서 주도적 역할을 했던 인물이다.
시댁 역시 안동의 모스크바로 불리며 권오설, 권오상, 권오운, 권오직 등 많은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가일마을이다.
시아버지 권준희는 광복회에 참여했고, 아들 권오헌 역시 신간회, 안동청년동맹 등에 가담하는 등 활발한 독립운동을 했다.
'눈물뿌린 이별가'에는 고향과 벗을 이별하는 장면, 가족과의 해후에 대한 기대 등 애절한 심경이 담겨 있다.
'이별할 '별(別)'자는 누가 만들었나, 못할 것이 이별일세 / 손잡고 통곡하니 떠날 사람 붙들 수 있겠는가 / 안 갈 도리 있으면 오죽 좋으련만 / 그럴 도리 없으니 어서 빨리 가세 / 아들손자 먼저 가서 (나를) 데려가려 하는 것이니 / 만주길 몇천 리를 속절없이 가는구나/ 가일마을아 잘 있어라 다시 볼 수 있겠는가'
김우모 여사가 고향을 떠나는 심경을 여실히 드러낸 구절이다.
가사 말미에 '수삼 일이 지나가면 고진감래 되리라 / 기차에서 내려가면 아들 손자 만날 수 있으리 / 면면히 손잡으면 반겨 맞이할 일 미리 좋다 / 그동안 쌓인 억만 회포 낱낱이 더하며 이야기 할 것이다'라는 구절도 있다.
고향과 생이별 하는 고통도 있지만 만주에 있는 자식을 보고 싶어 하는 어머니의 심경을 느낄 수 있다.
정종섭 한국국학진흥원장은 "일제에 의해 나라가 무너진 상황에서 고향을 뒤로하고 고난의 길을 떠나는 독립운동가와 그 가족, 그들의 삶과 애환이 한글가사에 고스란히 남아 당시의 상황을 생생하게 전달해 준다"고 말했다.
◎공감언론 뉴시스 [email protected]
Copyright © NEWSIS.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