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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이 역사다]⑧민종식 유배의 길을 떠나다

등록 2012.03.22 15:33:56수정 2016.12.28 00:2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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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뉴시스】박희송 기자 = 국가기록원은 22일 별시문과에 급제, 이조참판까지 지낸 조선의 관료였던 민종식(1861~1917)은 1904년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충남 청양 칠갑산 자락에 터를 잡고 동지를 모아 의병을 일으킨 후 체포돼 진도로 유배의 길에 오르고 끝내 해방된 조국을 보지 못한 채 1917년 운명을 달리하고 말았다고 밝혔다. 사진은 국가기록원에 보관돼 있는 민종식 선생 판결문 원본. (사진=국가기록원 제공)  photo@newsis.com 

【대전=뉴시스】박희송 기자 = 국가기록원은 22일 별시문과에 급제, 이조참판까지 지낸 조선의 관료였던 민종식(1861~1917)은 1904년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충남 청양 칠갑산 자락에 터를 잡고 동지를 모아 의병을 일으킨 후 체포돼 진도로 유배의 길에 오르고 끝내 해방된 조국을 보지 못한 채 1917년 운명을 달리하고 말았다고 밝혔다. 사진은 국가기록원에 보관돼 있는 민종식 선생 판결문 원본. (사진=국가기록원 제공)  [email protected]

【대전=뉴시스】박희송 기자 = "콩밭 메는 아낙네야 베적삼이 흠뻑 젖는다. 무슨 설움 그리 많아 포기마다 눈물 심누나"

 '칠갑산' 노랫말의 한 대목이다. 칠갑산 노래로 유명해진 충남 청양에 위치한 칠갑산은 '충남의 알프스'라는 말이 무색하지 않게 웅장한 모습을 드러낸다.

 칠갑산은 7명의 장수가 나올 명당자리라 해 이름 붙여졌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칠갑산 자락이 품은 정산면 천장리에는 한말 의병장 민종식 고택이 자리하고 있다.

 ◇1895년 8월20일 새벽…조선의 하늘은 울고 있었다

 민종식(1861~1917)은 별시문과에 급제, 이조참판까지 지낸 조선의 관료였다. 하지만 1895년 을미사변은 그의 인생에 전환점이 됐다.  

 1895년 8월20일 새벽 조선의 심장 건청궁은 피로 물들었다. 일본 주한공사 미우라(三浦梧樓) 일당은 '여우사냥'이라는 작전명을 짓고 조선의 국모인 명성황후를 처참하게 살해했던 것이다.

 일제는 이에 저항하는 고종황제를 협박하고 왕세자에게까지 칼을 휘두르는 만행도 서슴지 않았다.

 조선의 하늘은 울고 있었다. 민종식은 관직을 버리고 충남 청양 칠갑산 자락에 터를 잡았다. 일제의 심장을 겨눌 칼날을 세우기 위함이었다.

 ◇민종식 고택 뒷마당의 탱자나무는 오늘도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1904년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민종식은 청양에서 뜻을 같이하는 동지를 모아 의병을 일으켰다.

【대전=뉴시스】박희송 기자 = 국가기록원 이승억 학예연구관은 22일 국가기록원에서 "민종식 의병부대는 충남 서해안의 중심이었던 홍주성을 점령한 것에서 볼 수 있듯이 의병의 세를 가름해 볼 수 있다"면서 "비록 한말 의병은 미완의 전쟁을 끝났지만 이후 독립운동의 자양분이 된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된다"고 밝혔다. 사진은 한말 의병장 민종식 선생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국가기록원 이승억 학예연구관. (사진=국가기록원 제공)  photo@newsis.com

【대전=뉴시스】박희송 기자 = 국가기록원 이승억 학예연구관은 22일 국가기록원에서 "민종식 의병부대는 충남 서해안의 중심이었던 홍주성을 점령한 것에서 볼 수 있듯이 의병의 세를 가름해 볼 수 있다"면서 "비록 한말 의병은 미완의 전쟁을 끝났지만 이후 독립운동의 자양분이 된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된다"고 밝혔다. 사진은 한말 의병장 민종식 선생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국가기록원 이승억 학예연구관. (사진=국가기록원 제공)  [email protected]

 민종식 의병부대는 청양을 비롯해 서천·비인·판교·보평 등 충남 서해안 지역에서 승전고를 울렸다. 그리고 그는 여세를 몰아 마침내 홍주성을 점령했다.

 홍주성은 서울로 통하는 교통의 요지였다. 신식무기로 중무장한 일본군은 총공세로 맞섰다. 결국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의병 80여명이 죽고 140여명이 생포되는 피해를 입고 말았다. 때는 1906년 5월.

 가까스로 홍주성을 빠져 나온 민종식은 다시 의병을 일으키기 위해 대열을 정비하고 있었다. 하지만 1906년 11월 일진회 회원의 밀고로 붙잡혀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는 법부대신 이하영의 주청으로 감형돼 진도로 유배의 길을 떠났다. 그리고 다음해인 1907년 12월 특사로 풀려났다.

 하지만 민종식은 일제를 향한 저항의 끈을 놓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끝내 해방된 조국을 보지 못한 채 1917년 운명을 달리하고 말았다.

 충남 청양군 정산면 천장리에 위치한 민종식 고택 뒷마당에 자리한 탱자나무는 오늘도 그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이다.

 민종식 의병장의 활동에 대해 국가기록원 이승억 학예연구관은 "한말 의병은 구국 전쟁이었다. 민종식 의병부대는 충남 서해안의 중심이었던 홍주성을 점령한 것에서 볼 수 있듯이 의병의 세를 가름해 볼 수 있다"면서 "비록 한말 의병은 미완의 전쟁으로 끝났지만 이후 독립운동의 자양분이 된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할 만하다"고 말했다.

 민종식은 '무슨 설움 그리 많아 포기 마다 눈물'을 심었을까. 그것은 나라 잃은 백성이 흘린 피눈물이요, 서러움이었을런지도 모르겠다.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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