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⑭신종 양릉서 고려 두 번째로 시책(諡冊) 출토

14회 최충헌이 옹립한 고려 20대 신종(神宗)의 무덤 양릉(陽陵) 1122년 예종(睿宗)이 사망한 후 장남이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고려 17대 임금 인종(仁宗, 재위:1122~1146)이다. 인종 때는 외척인 이자겸(李資謙)의 난, 서경(西京, 평양) 천도를 주장한 묘청(妙淸)의 난 등으로 사회가 혼란스러웠다. 이때부터 고려가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다. 묘청의 난을 진압한 김부식(金富軾)이 삼국사기(三國史記)를 편찬한 것도 이 무렵이다. 재위 24년 만에 사망한 인종의 능 호는 장릉(長陵)이지만 능의 위치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다만 일제 강점기 때 장릉에서 도굴된 고려청자, 시책(諡冊) 등의 유물이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보존돼 있다. 시호(諡號)와 생전의 업적 등을 새긴 시책에는 묘청의 난을 진압한 일, 원구에서 제사 지낸 일 등 인종의 생전 업적과 인품이 서술돼 있고, 말미에 시호와 묘호(廟號)가 기록돼 있다. 고려 왕릉에서 시책이 발견된 첫 번째 사례이다. 명문에는 “1146년(皇統 6年) 3월”이라는 연호가 나오는데, 인종이 1146년 2월 28일(음) 보화전(保和殿)에서 죽고 3월 15일(음) 도성 남쪽 장릉에 장사지냈다는 <고려사>의 기록에 근거해 볼 때, 이 시책은 그사이에 제작되어 함께 묻혔던 것이 분명하다. 인종의 장남으로 왕위에 오른 고려 18대 의종(毅宗, 재위 1146-1170) 때는 무신란(武臣亂)이 발생했다. 1170년 의종이 문신들을 거느리고 장단(長湍) 보현원(普賢院)에 행차할 때, 왕을 호종하던 대장군 정중부(鄭仲夫)와 이의방(李義方) 등이 반란을 일으켜 왕을 수행했던 문신들과 개성에 있던 주요 문신들을 대량 학살했다. 고려의 문신 귀족정치가 종말을 고하고 새로이 무신정권이 성립하게 된 것이다. 그 뒤 1세기 동안이나 무신들에 의한 정치지배가 계속되어 고려사회는 일대 전환기를 맞이했다. 왕위에서 쫓겨난 의종은 3년 뒤인 1173년(명종 3) 무신 이의민(李義旼)에 의해 경주 곤원사(坤元寺) 북쪽 연못 위에서 47세의 나이로 시해됐다. 그의 장례식은 2년 뒤에 치러졌고, 개성 동쪽에 안장했으며 능 호를 희릉(禧陵)이라 했다. 이후 의종의 비 장경왕후(莊敬王后)가 사망하자 합장됐다. 희릉의 위치는 알려지지 않았었는데, 북한 학계가 2000년에 황해북도 장풍군 고읍리에 있는 ‘고읍리 1릉’을 희릉이라고 발표했다. 1994년 북한학계의 발굴보고서에 따르면 병풍석이 남아 있고, 12지신상이 새겨져 있으며, 숙종(肅宗) 때 유통된 해동통보(海東通寶)가 발견된 점으로 봐서 이 무덤이 12세기 또는 그 이후의 왕릉인 점은 분명한 것으로 추정된다. 의종이 폐위된 후 그의 동생 익양공(翼陽公)이 왕위에 오르니 19대 명종(明宗, 재위:1170~1197)이다. 그러나 왕은 허수아비에 불과했고, 실권은 무신들에게 넘어갔다. 1196년에 최충헌(崔忠獻)이 이의민을 죽이고 정권을 장악한 뒤 정치의 쇄신과 중흥을 목표로 하는 내용의 봉사십조(封事十條)를 올리자 그대로 받아들였는데도 다음 해인 1197년에 폐위당해 동생인 평량공(平凉公) 왕민(王旼: 신종)에 왕위를 물려줬다. 5년 뒤 사망한 명종은 개성 도성 동쪽에 묻혔다. 능 호는 지릉(智陵)이다. 지릉은 몽골 침입 때 훼손된 것을 다시 보수됐다. 1916년 일제 발굴조사보고서에 따르면 당시 ‘고려명종지릉(高麗明宗智陵)’이라 쓴 표지석과 한 쌍의 석인(石人)이 남아 있었지만, 병풍석과 석난간(石欄干)은 모두 없어진 상태였다. 현재 행정구역상으로는 황해북도 장풍군 항동리에 있으며, 군사분계선과 가까워 접근성이 떨어진다. 고려 20대 신종((神宗, 재위:1197~1204)은 인종의 다섯째 아들이자 명종의 친동생으로 최충헌이 명종을 폐한 후 옹립한 왕이다. 신종 때는 ‘민란의 시대’였다. 신종 즉위년에 만적(萬積)의 난을 비롯해 이듬해 강원도 명주(溟州)의 난, 진주(晉州)·금주(金州: 김해)·합천(陜川)·경주(慶州)·광주(廣州) 등지에서 잇달아 민란이 일어났다. 신종은 1204년 병이 심해져 태자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죽은 후 개성 도성 남쪽에 묻혔다. 능 호는 양릉(陽陵)이다. 양릉은 개성성 남쪽에 있는 용수산(龍首山) 남쪽 자락에 있다. 현재 행정구역상으로는 개성시고남리(일본강점기 때 경기도 개성군 청교면 양릉리 양릉동)에 속하며, 고려 3대 정종(定宗)의 무덤인 안릉(安陵) 인근에 있다. 1910년대 이뤄진 일제의 고적 조사에 따르면 당시 “능의 높이는 9척(尺) 6촌(寸), 직경은 24척이며 병석(屛石)은 잔존하지 않으며 석수(石獸) 또는 석난간(石欄干)의 파편으로 보이는 돌이 있다”라고 했다. 현재는 봉분과 난간석 파편 1개, 문인석 2개만 남아 있다. 봉분도 병풍석이 모두 없어져 봉토만 남아 있는 상태로 확인된다. 1978년 북한 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가 발굴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봉분의 직경은 9m, 높이는 2m이다. 무덤 칸(묘실)은 평천장을 한 장방형의 돌 칸으로 지하에 마련됐다. 무덤 칸의 바닥에는 네모난 벽돌을 깔고 중심에 돌로 관대(棺臺)를 만들어 놓았다. 발굴 당시 관대 위에 사람의 뼛조각이 흩어져 있었고 관대의 좌우에 파헤쳐진 자리가 있다고 한다. 벽과 천장에는 벽화가 있었지만 희미해져 잘 알아보기가 힘든 상태이다. 천정은 북두칠성을 비롯한 별들과 달이 그려진 천체도를 확인할 수 있었고, 그려진 별의 수는 158개라고 한다. 다른 고려 왕릉과 마찬가지로 양릉도 여러 차례 도굴됐지만, 다행히 발굴 때 청자 조각, 금동자물쇠, 금동 방울, 백동거울, 걸개못, 고리 손잡이, 여러 종류의 철정(鐵釘)과 청동 화폐 등이 출토됐다. 양릉은 비록 왕릉으로 보기 어려울 정도로 황폐해졌지만 고려의 무덤 제도와 문화연구에서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특히 북한은 ‘돋을새김한 청자 조각’들과 ‘청자모란꽃무늬박이대접’의 조각, ‘구름무늬박이대접’의 조각들을 12세기 말~13세기 초의 무늬박이 청자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한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출토물은 역시 신종의 시호와 생전의 업적 등을 새긴 시책(諡冊)이다. 양릉에서는 ‘대어백(待於百)’, ‘화사년(和四年)’, ‘신문(臣聞)’, ‘왕신(王臣)’, ‘왕묘(王廟)’ 등 33점의 판독 가능한 시책편(石間)이 출토됐다. 그 중 ‘○화사년(○和四年)’명 시책편은 연호를 표기한 것으로, 인종 장릉의 ‘황통육년(皇統六年)’ 시책과 같이 시책의 도입부로 추정된다. 신종 때 사용된 연호는 송나라의 경원(慶元), 가태(嘉泰)와 금나라의 승안(承安), 태화(泰和)가 있어서 학계에서는 태화의 ‘태(泰)’자가 확인할 수 없는 글자로 추정하고 있다. <고려사> 연표에는 신종이 “태화 4년(1204) 정월에 신종이 훙(薨; 제후나 높은 관리가 죽다)하였다”라고 기록돼 있다. 이 무덤이 신종의 능이란 것을 확증해준 유물이다. 시책이 출토되지 않았다면 이 초라한 무덤을 고려 왕릉이라고 판단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신종의 왕비 선정태후(宣靖太后)는 양릉에 합장되지 않고 따로 묻혔는데, 그의 무덤인 진릉(眞陵)은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는 상태다. 정창현 평화경제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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