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3.29 (금)
서울 6℃
[광복 75주년] ㉚미·소 양군 떠나자 충돌 빈발 '전쟁의 서막'
30. 전쟁의 전주곡 (마지막회) 1948년 8월과 9월 38선 남과 북에 분단 정부가 공식 선포되면서 3년간의 미·소 군정의 시대가 끝났다. 1945년 8월 해방 당시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위해 그은 38선이 ‘분단선’이 될 것이라고 예상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1946년 남과 북에 ‘남조선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과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광복 75주년] ㉙북서도 4월 헌법 제정·9월 ‘정부’ 선포
29.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전후해 38선 이남에서는 이른바 ‘지하선거’라는 또 하나의 선거가 진행됐다. 월북한 남조선노동당 지도부의 지시로 남쪽에 남아 있던 남로당원들 주도로 이뤄진 간접선거였다. 1948년 7월 10일 북조선인민회의 제5차 회의에서 헌법을 공포하고, 최고인민회의 선거 실시를
[광복 75주년] ㉘대한민국 정부 수립되다
28. 헌법 제정과 대한민국 정부 수립 제헌국회의원이 선출되고 5월 31일 국회가 개원되자 정부 구성을 위해 가장 시급한 제헌 작업이 시작됐다. 먼저 헌법 초안을 만들기 위해 서상일(徐相日) 의원을 위원장으로 하는 헌법기초위원회가 구성됐다. 헌법기초위원회에는 전문위원으로 위촉된 유진오(兪鎭午) 교수를 대표로 하여 제출된 안을 원안(原案)으로 하
[광복 75주년] ㉗첫 남한 총선거 이승만계 과반 획득 실패
27. 제헌국회의원 선거와 헌법 제정 1948년 5월 10일 개운사(開運寺)에 마련된 동대문구을 지역구 선거투표소에 사과를 든 어린 아이가 부모와 함께 도착했다. 투표소 앞에 붙은 입후보자의 이름과 번호가 표시된 선거공보를 꼼꼼히 살피고 선거인명부를 확인한 아버지와 어머니가 투표용지를 받아 기표소에 들어갔다. 아버지가 투표하는 동안 아이는 무엇이 궁금
[광복 75주년] ㉖ 좌우대립 속 육사 3기생 적·동지로 갈려
26. 육사 3기 졸업앨범 미군은 군정청을 설립한 지 두 달 정도 지난 뒤에 1945년 11월 3일 미군정청 내에 국방과 경비를 전담하는 기구로 국방사령부를 설치했다. 국방사령부는 1946년 3월 29일 미군정법령에 의거 국방부(DND: Department of National Defense)로 개칭됐다가 다시 ‘국방’이라는 용어를 삭제하고 국내경비
[광복 75주년] ㉕ 남으로, 북으로… 분단이 낳은 이산가족
25. 월남(越南)과 월북(越北), 엇갈린 선택 1945년 해방과 함께 38선이 그어지고 미군과 소련군이 38선 남과 북에 각각 진주하면서 한반도에서는 활발한 ‘인구 이동’이 이뤄졌다. 특히 해방 전 일본, 만주로 이주했던 120만 명이 넘는 동포들이 귀국하면서 남한 인구는 단기간에 폭발적으로 늘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제헌의회 개원식 축사에서
[광복 75주년] ㉔ "분단은 막자" 마지막 시도로 남북협상
24. 남북연석회의와 ‘4김(金) 회담’ 1948년 2월 10일 김구(金九) 한국독립당 위원장은 ‘삼천만 동포에게 읍고(泣告)함’이란 성명을 발표했다. “이 육신을 조국이 수요(需要)한다면 당장에라도 제단에 바치겠다. 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가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에 구차한 안일을 취하여 단독정부를 세우는 데는 협력하지 아니하겠다
[광복 75주년] ㉓ 남북 오가며 현대 민족춤 토대 마련한 최승희
23. 최승희무용연구소의 설립과 해체 2019년 은퇴한 이재일 조선노동당 선전선동부 제1부부장은 1960년경에 당중앙위원회 선전선동부에 배치된 후 56년 동안 줄곧 언론과 출판, 문화예술 분야를 담당해온 고위 관료였다. 그가 은퇴 후 공개된 회고담에 무용가 최승희(崔承喜)의 말년과 관련된 내용이 포함돼 있어 흥미롭다. “(내가 당중앙위원회에 배치
[광복 75주년] ㉒ 정치의 계절에 호황 누린 출판계
22. ‘출판 혁명의 시대’ – 억눌렸던 대중의 지적 욕구 폭발 해방이 된 지 채 1년이 되지 않아 서울에만 100여 개의 정당과 정치단계가 생겨났다. 그야말로 ‘정치의 계절’이었다. 그에 따라 정치와 이론을 담은 팸플릿과 책들이 쏟아져 나왔다. 일제 강점기 동안 억눌렸던 대중의 지적(知的) 욕구도 폭발했다. 당시 “8·15 이후의 장관은 실로
[광복 75주년] ㉑두 건의 정치암살 1947년 정국 강타
21. 몽양 여운형과 설산 장덕수 암살사건 1947년 5월 24일 오후 5시부터 서울 필동에 있는 미소공동위원회 미국 측 수석대표인 브라운 소장 관저에서 제2차 미소공위 개최를 축하하는 칵테일 파티가 열렸다. 이 자리에는 미국과 소련 측 미소공위 위원들을 비롯해 대표단을 비롯해 이승만(李承晩), 김구(金九), 안재홍(安在鴻), 김성수(金性洙), 장덕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