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⑬1946년 콜레라가 한반도를 덮치다

13. 해방과 함께 찾아온 전염병 1919년 3·1운동이 일어났을 때 전국의 모든 학교는 휴교 상태였다. ‘스페인 독감’이 원인이었다. 1918년 봄에 발생한 ‘스페인 독감’은 가을로 접어들면서 변종이 생겨 9월 이후 전 세계에서 사망자가 3000만 명 넘게 나왔다. 사망자의 70% 이상이 25~35세 사이의 젊은 층이었다. 스페인 독감은 중세의 흑사병 이래 가장 많은 사람의 생명을 앗아간 전염병이었다. 일제강점기 조선도 무풍지대가 아니었다. ‘스페인 독감’의 변종 바이러스가 가을부터 대유행하기 시작한 것이다.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는 “악성의 유행병, 몹시 아픈 감기”라고 표현했다. 11월에는 평양 인구의 절반이 감기로 고생한다는 기사가 실렸다. 일부 군에서 사망자가 2000명이 나와 “온 가족이 앓아누워 죽은 사람을 묻을 사람이 없는 형편”이었다. 경성(서울)에선 개도 ‘돌림감기’로 전염돼 죽으니 조심하라는 경고가 나왔다. 백범일지(白凡逸志)에 따르면 김구 선생도 “스페인 감기로 20일 동안 치료”받았다고 한다. 1918년 조선총독부 <통계연감>은 총인구 1670만 명 중 44%인 742만 명의 독감 환자가 발생해 14만여 명이 죽었다고 집계했다. 사망자 수가 축소됐을 가능성을 고려하면 엄청난 숫자다. 농촌에서는 들녘의 익은 벼를 해가 지나도 거두지 못할 정도로 상여 행렬이 끊이질 않아 조선 팔도의 민심이 흉흉했다고 한다. 조선총독부의 늦장 대응과 차별적 대우가 몰고 온 대참사였다. 최근 학계에서는 ‘스페인 독감’의 대유행이 다음 해 3·1운동 폭발의 한 요인이 됐을 것이라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독감 유행으로 인명 피해가 속출했지만, 조선총독부는 적절한 방역 대책을 마련하지 못했고, 오히려 독감 유행을 조선인의 열악한 위생 상태 탓으로 돌리는 태도를 보이면서 분노를 촉발했다고 한다. ‘스페인 독감’이 진정되자 이번에는 콜레라가 조선을 덮쳤다. 콜레라는 우리 역사에서 가장 파괴적인 전염병 중의 하나였다. 콜레라는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에 1821년(순조 21)에 상륙했다. 첫 대유행으로 수십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때 콜레라를 호열자(虎列刺)라고 했다. 호랑이가 육체를 찢는 듯한 고통이라는 뜻이다. 1919년과 1920년에 콜레라의 제2차 습격이 찾아왔다. 2년간 4만여 명이 발병했고, 그중 2만 5000여 명이 사망했다. 이때 콜레라를 ‘화독(和毒)’이라고 불렀다. 일본 사람들이 갖고 들어온 병이라는 뜻이다. 일제 경찰은 조금이라도 전염이 의심되면 무조건 끌어다가 막사에 격리했다. 이렇게 방치된 채 수많은 사람이 죽어갔다. 1945년 해방은 환희의 순간이었지만 반갑지 않은 손님이 다시 찾아왔다. 제3차 콜레라의 습격이었다. 1946년 5월 귀환 동포를 통해 콜레라가 부산에 상륙했다. 부산은 일제의 강제동원 등 다양한 이유로 조국을 떠났던 동포들이 돌아오는 통로였다. 당시 신문 기사를 보면 시작은 4월 말 중국 남부에서 귀환하는 동포 3150명을 실은 수송선이 부산항의 입항부터였다. 이미 배 안에서 콜레라와 파라티푸스가 발생해 미군 방역부의 격리 소독을 받느라고 1주일째 상륙을 못 하고 있었다. 배 안에 호열자가 창궐해 2명이 사망하자 미군은 시체를 영도 바닷가에 수장했다고 한다. 이는 인근 마을로 호열자를 퍼뜨리는 결과를 가져왔다. 미군정의 방역부에서 소독했지만 허술한 방역 정책은 호미로 막을 일을 가래로도 못 막게 했다. 그해 부산에서는 하룻밤에 80명씩 콜레라로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얼마 후 이번에는 상하이(上海)에서 귀환 동포를 태운 배가 부산항에 들어왔다. 그리고 이들 귀환 동포들에 의해 대전, 인천 등지로 콜레라가 퍼져나갔다. 6월 4일 미군정 보건후생부장은 담화를 발표해 부산 주민에게 1차 예방주사 접종을 마쳤고, 서울시민에게도 1차 예방주사 접종을 마칠 예정이라며 “남조선에 유행하고 있는 콜레라는 앞으로 2주일 내지 3주일 안으로 완전히 퇴치할 준비를 하고 있다”고 상황을 낙관했다. 그러나 6월로 넘어가는 시점에서 이미 이남 전역으로 확산해 전국이 ‘콜레라 공포증’에 빠져들었다. 연합군 총사령관 맥아더 장군은 미 육군부에 제출한 6월 월례 보고서에서 “6월 중에 보고된 호열자 환자 수는 1212명인데, 그중 651명은 사망했다”고 보고했다. 하지 주한미군사령관의 정치고문이던 레너드 버치(Leonard Bertsch) 중위는 7월 13일 “콜레라로 5500명 사망”했다는 메모를 남겼다. 한 달 사이에 사망자 수가 10배가량 폭증한 것이다. 이후 8월 초순까지 신문 지상에는 거의 매일 콜레라 관계 기사가 실렸다. 당시 대구에서 콜레라 환자들을 진료한 23세의 박희명 수련의는 그때의 상황을 이렇게 회고했다. “아무튼 그 당시 콜레라는 사망률이 거의 100%였어요. 왜 그렇게 높았는가 하면, 치료에 있어서 제일 중요하고 필수적인 것은 정맥을 통해서 대량의 액체를 공급해 주는 것인데, 그 당시 그런 약이 하나도 없었어요. 단지 가물에 콩 나듯 미군들이 가져다주는 약에 의존하는 수밖에 없었죠.” 미군정 보건후생국장은 “주사약을 제조해 175만 명 분을 38도 이남 각지에 분배했다”고 발표했지만, 턱없이 부족한 양이었고, 그나마 농촌에서는 구경하기도 힘들었다. 콜레라가 대유행하면서 걸리면 죽는다는 공포가 전국으로 확산했다. 환자를 병원으로 실어 올 때 따라오려는 가족이 거의 없었고, 죽은 후 시신을 찾아가는 사람도 많지 않았다고 한다. 미군은 진주 직후 군정청에 대규모의 보건후생부를 만들고 각 도에 보건후생국을 두었다. 그러나 실무를 맡을 전문 인력이 턱없이 부족했다. 식민지 지배 질서가 무너진 자리를 새 질서가 미처 채우지 못하고 있던 상황에서 보건의료 분야 역시 일본 강점기 때와 마찬가지로 전염병을 범죄로 취급했던 경찰이 관행적으로 담당하고 있었다. 전국적으로 빠르게 퍼진 콜레라의 확산 속도에 미군정 당국은 속수무책이었다. 단지 ‘호열자’ 예방 전단을 공공장소에 붙이거나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는 것이 고작이었다. 미군정이 만들어 배포한 전단에는 ‘호열자 예방’을 위한 여러 실천 사항들이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겁내지 말고 다음과 같이 호열자를 방지하자. 파리를 죽이자. 파리채와 파리약으로. 음식물은 반드시 뚜껑을 덮어 파리가 없는 장소에 보관하자. 소독하지 않은 물은 반드시 끓여 먹자. 음식 먹기 전과 대변 본 뒤에는 반드시 손을 씻자. 난데없는 살인자가 되지 말고, 제각기 방역 규칙을 지켜 동족에게 균을 전염시키지 말자. 이웃이나 가족 중에 설사하고 토하는 사람은 주저치 말고 당국에 신고하자. 호열자는 결국 부주의한 사람에게만 전파하게 된다.” 결국 주변 환경 개선과 개인위생 관리를 잘하고, 환자가 발생하면 당국에 신고하라는 처방이었다. 일반 대중들에게는 일제강점기 때와 달라진 게 없었다. 많은 학교가 휴교에 들어갔고, 외부와의 격리에 성공한 마을은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었지만 그렇지 못한 일부 마을들은 전체 주민이 사망하는 사례까지 발생했다(‘40호 부락이 전멸 상태’ <영남일보>, 1946년 8월 4일 자). 이남 지역에서 5월부터 10월 중순까지 전체적으로 1만 4909명이 콜레라에 걸렸고, 그중 9632명이 목숨을 잃었다(<동아일보> 1946년 10월 12일 자). 이남에서 콜레라가 창궐(猖獗)하면서 곧 이북에도 전파됐다. 해방 직후 북한의 보건의료 상황도 열악하기는 마찬가지였다. 1945년 10월 소련군의 조사에 따르면 당시 이북지역에서 장티푸스, 이질, 재귀열, 홍역 등의 병들이 유행하고 있었고, 약국은 물론 평양과 함흥 등 산업 도시에 위치한 제약공장들 역시 폐쇄 상태였다. 2월 8일 발족한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에 보건국이 설치됐지만, 전체 의사 수는 1000여 명에 불과했고, 학교 보건의나 전염병 전문의는 한 명도 없었다. 그나마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보건국은 가장 긴박한 문제로 ‘전염병 예방문제’를 꼽고, 일찍 중국의 화북지방과 만주 등지에서 귀국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신의주를 비롯한 북·중 국경지대에 검역소를 설치했다. 또한 4월 1일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는 ‘각 도시 촌락 청소 미화 및 전염병 예방에 관한 결정서’를 채택하고 대대적으로 대중적인 ‘위생문화개선운동’을 벌이기 시작했다. 이 결정서에는 “전염병이 유행하는 지방에서는 대중의 집회를 금지할 것”, “각 리 및 면의 반장은 반 내에 발열환자 혹은 전염병 의사자가 발생한 시는 직시로 방역검열의(防疫檢閱醫)의 진찰을 받도록 알선할 것” 등 구체적인 대응 방침도 포함돼 있었다. 6월 말 이북지역에도 콜레라 환자가 발생하자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보건국은 즉시 콜레라 비상 방역령을 발령하고, 긴급방역 대책 조직인 방역위원회를 상설화한 후 도·시·군·면 방역위원회 및 직장 방역위원회를 연결하는 조직체계를 구성했다. 그리고 환자 발생지역에는 가설검역소를 설치하고 검역을 강화하고, 도 경계 지대 도로에도 가설검역소를 설치했다. 또한 콜레라 발생지역에 교통을 차단하고 집회를 금지하였으며, 전 해안선에서 선박 항해와 어로를 금지했다. 특히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는 콜레라 방역사업을 전 국가적 사업으로 설정하고 정당, 사회단체들과 광범한 주민이 참가하는 대중적 운동으로 벌여나갔다. 이에 따라 학교와 공장, 기업은물론 거리에서도 검병(檢病) 호구조사와 콜레라 방역 상식보급사업 등 콜레라 방역사업이 전개되었다. 소련군도 즉각 전염병 확산을 막기 위해 비상조치를 내렸다. 콜레라 발생 직후 치스차코프 소련군 사령관은 하지 미군 사령관에게 서신을 보내 인구 이동이 활발한 38선에서 철저한 방역 실시를 요청했다. 실제로 1946년 남한과 연결된 강원도와 황해도 지역은 1944년에 비해 전체 전염병이 각각 약 7배, 8배 상승했다. 소련군은 귀환자를 막기 위해 북한과 만주의 국경을 폐쇄했다. 외부와 격리하는 선제적 조처를 한 셈이다. 이와 동시에 소련은 300여 명의 군의관을 북한에 파견하고 진남포와 원산에 500병상 규모의 병원 2개를 신축했다. 소련적십자는 4개 방역부대를 의료기기, 약품과 함께 북한으로 파견했으며, 38도선 인근 지역에 60병상 규모의 야전병원을 여러 개 설치하고 치료사업에 착수했다. 근본적 해결책인 백신 생산을 위한 연구와 노력도 병행되었다. 1946년 서북방역연구소가 조직됐고 1947년에는 북조선전염병연구소로 확대 개편됐다. 소련군의 지원으로 1947년부터 국가에서 전염병 치료와 백신 접종을 무료로 실시하고, 전염병 연구소에서 콜레라, 장티푸스 백신 등 25종의 백신 생산을 시작했다. 이남 지역보다 선제적 조처를 한 이북 지역에서는 발병자 수가 1/10 정도에 그쳤다. 대대적인 방역사업의 결과 이북지역에서는 8월경부터 콜레라 발생이 현격히 줄어들었고, 10월 중순 공식적으로 ‘콜레라와의 전쟁’이 종료됐다. 전체 발병자 수가 축소됐을 가능성이 있지만, 러시아 문서에 따르면 이북에서는 1275명의 환자가 발생했고, 그 가운데 704명이 사망했다. 남이나 북이나 전염병에 대한 ‘무지(無知)’와 과거의 트라우마가 어려움을 가중했다. 소련 민정청이 작성한 ‘북조선 주재 소련민정청 사업 결산보고서(1945년 8월-1948년 11월)’에 따르면 1946년 콜레라가 발생했을 때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나 소련군은 환자들을 숨기지 말고 병원에 입원 시켜 치료받도록 한국 주민을 설득하는 데 큰 어려움을 겪었다. ‘일본식 콜레라 대응책’에 대한 공포 때문이었다. 일제강점기 때 전염병 환자는 원칙적으로 의료기관에서 치료를 받지 못했다. 전염 병동이나 일반 병원에 전염병 환자부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환자들은 치료 없이 주변으로부터 격리되지 않은 상태로 집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일제 경찰은 콜레라가 발생하면 발병 근원지를 포위해 외부와 격리해 그 지역의 모든 사람이 병과 기아 때문에 몰살되기까지 기다렸다. 공포감으로 주민들은 콜레라가 발병해도 숨기는 경우가 많았고, 전염병이 광범위하게 확산하곤 했다. 대대적이고 적극적인 계몽과 선전이 이뤄진 뒤에야 주민들은 환자들을 기꺼이 병원에 입원시켰고, 콜레라에 대한 의심의 여지가 조금이라도 보이면 신속히 연락을 취해 환자를 격리 처방할 수 있도록 협조했다. 1946년 콜레라 사태에 대한 남과 북의 초기대응은 서로 달랐다. 남은 발생 초기 상황을 낙관하다 대유행을 초래했고, 북은 선제적 봉쇄조치와 대대적인 위생개선 활동으로 조기 진압에 성공했다. 일제강점기 1919~1920년의 대유행을 제외하면 1946년의 콜레라 사태는 20세기 한반도에서 발생한 콜레라 중 가장 큰 규모였다. 해방된 나라에 신고식을 하듯 혹독하게 한반도를 강타했던 콜레라는 이후에도 잊을만하면 발생해 많은 희생자를 낳았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1946년의 콜레라 대유행이 남과 북에 전염병 방역체계를 구축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줬다. ‘괴질(怪疾)’, ‘호열자’로 불린 콜레라는 이제 공포가 아닌 치유 가능한 질병의 하나가 됐다. 사스, 메르스, 에볼라, 신종플루, 코로나19 등 신종 전염병이 잊을만 하면 창궐해 모든 사람의 일상생활을 변화시키고 있지만, 이 또한 역사의 한 단편이 될 것이다. 정창현 평화경제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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