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㉘대한민국 정부 수립되다

28. 헌법 제정과 대한민국 정부 수립 제헌국회의원이 선출되고 5월 31일 국회가 개원되자 정부 구성을 위해 가장 시급한 제헌 작업이 시작됐다. 먼저 헌법 초안을 만들기 위해 서상일(徐相日) 의원을 위원장으로 하는 헌법기초위원회가 구성됐다. 헌법기초위원회에는 전문위원으로 위촉된 유진오(兪鎭午) 교수를 대표로 하여 제출된 안을 원안(原案)으로 하고, 권승렬(權承烈) 전문위원의 안을 참고안으로 하는 헌법 초안이 제출됐다. 유진오 박사의 ‘헌법기초 회고록’에 따르면 제헌국회는 바이마르 헌법부터 중국 헌법까지 세계 각국 헌법을 참고해 1차 초안을 작성했다고 한다. 초안 심의과정에서 두 가지 사안이 크게 논란이 됐다. 하나는 국호(國號) 문제였다. 6월 3일 첫 모임을 한 헌법기초위원회에서는 이승만(李承晩) 국회의장이 이끄는 독립촉성국민회에서 제안한 ‘대한민국’이 무난하게 합의될 것으로 예상됐다. 그러나 한국민주당 측에서 ‘고려공화국’을 제안하면서 논의가 복잡해졌고, ‘조선공화국’, ‘한국’ 등의 국호도 거론됐다. 결국, 합의가 안 돼 헌법기초위원회가 헌법안 심의 첫날인 6월 7일 투표를 해 ‘대한민국’으로 결정됐다. 투표 결과는 ‘대한민국’ 17표, ‘고려공화국’ 7표, ‘조선공화국’ 2표, ‘한국’ 1표였다. 서상일 위원장은 6월 23일 헌법기초위원회가 마련한 헌법안(案)을 본회의에 보고하면서 “국호 문제가 말이 많이 있었습니다. 대한민국으로 하느냐, 고려공화국으로 하느냐, 혹은 조선이라고 이름을 정하느냐, 혹은 한(韓)이라고 하느냐 하는 국호 문제가 많이 논의되었든 것을 여러분에게 말씀드립니다”라고 밝혔다. 국호 문제는 헌법안이 본회의로 넘어온 뒤에도 논란이 계속돼 한국민주당 측은 계속 ‘고려’를 고집했고, 조봉암 의원은 대한민국임시정부뿐 아니라 국내외 다른 독립운동 세력들도 아우르는 국호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결국, 이승만 국회의장의 나서 “3·1운동에 의하여 수립된 임시정부의 국호대로 대한민국으로 정하기로 하고 국호 개정을 위한 토론으로 시간을 낭비함으로써 헌법 통과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합시다”라고 당부하면서 ‘대한민국’ 국호가 통과됐다. 다른 하나는 정부 형태였다. ‘유진오 초안’에는 국회를 양원제(兩院制)로, 정부 형태는 의원내각제로 하고 대통령과 부통령은 간선제로 선출한다고 제안됐다. 대통령보다 내각을 이끄는 국무총리에게 실권이 주어진 것이다. 한국민주당은 국론을 빠르게 모으고 분열을 방지하자는 논리로 양원제가 아닌 단원제(單院制)를 주장했고, 큰 논란 없이 투표 결과 단원제가 채택됐다. 문제는 의원내각제 도입이었다. 이승만 국회의장은 대통령의 권한을 약화한 의원내각제의 통과에 강하게 반대했다. 처음에는 이승만도 주변의 설득으로 의원내각제에 동의한 듯했으나, 헌법기초위원회의 최종 회의에서 대통령제를 채택하지 않으면 국회의원을 사퇴하겠다며 재차 강한 반대 의사를 표명했다. 결국, 헌법기초위원회는 이승만 의장의 주장에 따라 의원내각제를 대통령제로 수정했고, 대신에 대통령의 임기를 6년에서 4년으로 축소했다. 1948년 6월 23일 단원제 국회와 대통령중심제에 의원내각제적인 국무원 및 국무총리제가 가미된 절충안이 국회 본회의에 상정됐다. 7월 12일 제3독회를 모두 마친 뒤 헌법안이 국회를 통과해 마침내 1948년 7월 17일 대통령제와 단원제 국회를 주요 골자로 하는 ‘대한민국헌법’이 완성, 발표됐다. 제헌헌법은 전문, 10장, 본문 103조로 구성됐고, 전문을 통해 기미 3·1운동을 통해 대한민국을 건립하였다고 명시했으며, 제1장 총강 제1조에서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임을, 제2조에서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에게서 나옴을 규정했다. 헌법 제정 사흘 뒤인 7월 20일에 열린 제33차 국회 본회의에서는 초대 대통령과 부통령 선출을 위한 국회의원들의 투표가 있었다. 오전 회의에서 이승만 후보가 출석 의원 196명 중 180명의 지지로 대통령에 선출됐고, 오후의 부통령 선거에서는 임시정부 출신의 이시영(李始榮)이 133표를 얻어 당선됐다.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입장이었던 김구(金九) 지지표도 대통령 투표 때 13표, 부통령 투표 때 62표가 나왔다. 대통령과 부통령 취임식은 7월 24일 오전 비가 내리는 가운데 중앙청광장에서 국회의원 전원, 각 정당 사회단체 대표, UN조선위원단 위원, 주한미군사령관 하지 중장, 딘 군정장관 등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마지막 관문은 초대 내각 인선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7월 27일 국무총리로 이북출신인 이윤영(李允榮) 제헌의원을 내정했지만, 한국민주당의 반대로 국회에서 인준이 부결됐다(반대 132, 찬성 59표). 한국민주당은 국무총리로 김성수(金性洙) 당수를 밀고 있었다. 결국 이 대통령은 조선민족청년단을 이끌던 이범석(李範奭) 의원을 지명해 국회 인준을 받았다. 한국민주당 측은 총리직을 양보하는 대신 8명의 장관직을 요구했지만, 이 대통령은 이를 거부했고, 이후 한국민주당은 이 대통령과 맞서 야당의 길을 걷게 됐다. 5·10총선거부터 3개월 동안 여러 갈등과 논란을 거친 끝에 해방 3주년이 되는 1948년 8월 15일 오전 11시, 마침내 새로운 정부 수립과 독립을 선포하는 ‘대한민국 정부수립 국민축하식’이 시작됐다. 단상에는 이 대통령을 비롯하여 신정부 국무장관, 유엔 대표단과 미군 장성 등이 자리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정부 수립을 축하하기 위해 오는 맥아더(Douglas MacArthur) 연합군사령관을 마중하기 위해 직접 김포비행장까지 나갔다가 함께 식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축하식장인 중앙청 앞에는 경축하러 나온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어 전차 운행도 일시 중지됐고, 새 정부 수립을 경축하는 여러 대의 꽃 전차와 꽃자동차가 시내를 돌았다. 남대문과 동대문은 문루에 ‘대한민국 만세’를 가운데에 새겨 오색으로 단장됐다. 대한민국 정부의 첫 출발이었다. 1948년 12월 12일 열린 유엔 총회는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이 선거를 감시하고 자문할 수 있었으며 모든 한국인의 압도적 다수가 사는 한국의 그 부분(1948년 5월 10일 선거가 이뤄진 지역)에 대해 효과적인 통제권과 관할권을 갖는 합법적 정부가 수립되었다”라는 결의를 채택했다. 정창현 평화경제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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