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⑭동상이몽 좌우합작운동 비극적 종언

14. 서로 다른 의도로 추진된 좌우합작 운동 1946년 5월 임시정부 수립을 논의한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자 정국은 다시 격랑 속으로 빠져들었다. 통일임시정부 수립이 무산되고 남북이 분단될지 모른다는 우려가 팽배해졌다. 좌우 정치 세력의 셈법이 복잡해졌다. 중도 우파를 대표하는 김규식(金奎植)과 중도 좌파를 대표하는 여운형(呂運亨)이 좌·우파의 합작을 위한 논의를 위해 발 빠르게 움직였다. 조직적으로 보면 우파의 남조선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민주의원)과 좌파의 민족주의민족전선(민전)의 합작을 모색하는 것이었다. 미 국무부와 미군정도 미소공위가 휴회되자 새로운 정책을 구상했다. 기본 골자는 소련과의 협상, 좌우합작에 걸림돌이 되는 이승만, 김구 등 우익의 핵심인사를 2선으로 후퇴시키고, 중도 정치 세력을 육성하여 이를 토대로 임시 입법기구를 구성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정책은 좌우합작에 대한 공개적인 지지로 나타났다. 여론도 좌우합작에 긍정적이었다. <조선일보>는 6월 12일 자 사설에서 “누가 무슨 소리를 하든지 어떠한 사상과 어떠한 의도로든지 남북통일·좌우합작이 아니고는 조선의 완전독립이 될 수 없음은 상식화한 국민의 총의”라며 “신망을 잃어버린 지도자는 정치 노선에서 퇴각하고 참 지도자가 나설 때는 이때”라고 주장해 좌우합작 지지를 표명했다. 미군정에서 좌우합작 실무임무를 부여받은 인물은 주한미군사령관 하지 중장의 정치고문단의 일원인 버취((Leonard Bertsch) 중위였다. 5월 25일 좌우 대표의 첫 만남을 주선한 그는 6월 14일 자신의 집으로 민주의원을 대표하는 김규식과 민전을 대표하는 여운형, 허헌(許憲)을 초청해 약 2시간 반 동안 좌우합작체 구성에 대해 논의했다. 6월 21일에는 미소공위 미국 측 수석대표 아놀드 소장과 민주의원, 민전 대표자가 만났고, 24일에는 하지 중장 명의로 김규식, 여운형의 좌우합작 추진을 지지하는 특별성명이 발표됐다. 마침내 두 차례 예비회담을 거쳐 7월 25일 좌우합작위원회가 발족했다. 우측 대표는 주석 김규식, 대표 원세훈·김붕준(金朋濬)·안재홍(安在鴻)·최동오(崔東旿)이며, 좌측 대표는 주석 여운형, 대표 허헌·정노식(鄭魯湜)·이강국(李康國)·성주식(成周寔)이었다. 그러나 회담이 계속되면서 이견이 노출되기 시작했다. 토지개혁과 주요 산업의 처리, 친일파 청산, 신탁통치 문제, 인민위원회와 입법의원 문제 등에 대한 견해 차이가 컸다. 좌익 측은 “무상몰수·무상분배에 입각한 토지개혁, 친일민족 반역자의 제거, 정권을 인민위원회로 넘길 것” 등을 주장했고, 우익 측은 “임시정부수립 후 친일파 처리, 신탁통치 반대, 유상몰수·유상분배의 토지개혁” 등을 주장했다. 우여곡절 끝에 1946년 10월 7일 좌우합작위원회는 좌우합작 7원칙을 내놓았다. 좌우 정치 세력과 미군정의 입장이 절충된 안으로, ① 모스크바협정에 근거하여 남북의 좌우합작으로 민주주의 임시정부의 수립, ② 미소공동위원회의 속개를 촉구하는 성명서 발표, ③ 몰수·유상몰수·체감매상과 무상분배에 의한 토지개혁 실시, ④ 친일파 민족반역자 처리를 위한 조례 제정, ⑤ 정치범의 석방과 남북 좌우익 테러 즉각 중지, ⑥ 합작위원회에서 입법기구의 권한과 구성 방법 결정, ⑦ 언론·집회·결사·출판·교통·투표의 자유 보장 등이었다. 좌우합작 운동의 궁극적인 목표는 좌우 사상을 넘어서 ‘조선 반도’가 하나로 통합되어 중도적 사상의 임시 통일 정부를 수립하는 것이었다. 그를 위해서 먼저 좌파와 우파 세력들 간의 연대를 시작해서 합작 운동을 실현하고, 그런 다음에 서울과 평양 간의 남북연합을 추구하며, 최종적으로 미소공동위원회를 재개시키고, 미국과 소련 등 열강을 설득하여 ‘통일 임시정부’를 하루속히 추진하도록 한다는 구상이었다. 문제는 좌우합작 운동에 당시 좌우 세력의 ‘대주주’인 이승만·김구와 한국민주당, 박헌영과 조선공산당이 소극적 태도를 취하거나 노골적으로 반대 입장을 보였다는 점이다. 좌우합작 운동을 지원한 미군정도 소련이 인정할 수 있는 합작기구를 조직하되 김규식이 여운형과 허헌을 끌어들이면서 북한 측에 부의장직을 제공해 임시정부를 구성한다는 복안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소련 측의 지지를 받아내기는 불가능했다. 가장 주목되는 것은 이승만의 정치 행보였다. 사실 이 시기의 정치지형을 움직인 것은 좌우합작 운동이라기보다 이승만 민주의원 의장의 ‘남선순행(南鮮巡行)’이었다. 이승만은 1차(4월 15일-5월 9일)와 2차(6월 3일~9일)에 걸쳐 남한 각지를 순회했다. 이를 통해 전국적으로 미군정 추산 약 61만 8천 명 정도가 이승만 의장의 연설에 참여 또는 동원됐다. 미군정, 한국인 경찰과 관료, 우익 단체들의 완벽한 협동을 통해서만 이 같은 집회와 강연이 가능했다. 이승만의 개인적 인기는 귀국 이래 최고조에 달했고, 이를 기반으로 지방에서 열세였던 우익조직이 확실히 자리를 잡았다. 또한 이승만은 6월 10일~11일 개최된 대한독립촉성국민회(1946년 2월 8일 우익 정당들이 조직한 정치단체) 전국대회에서 김구를 중심으로 하는 임시정부계열을 밀어내고 실질적인 주도권을 장악했다. 그리고 다음 날 이승만은 21명의 각 도 대표에게 민족통일총본부를 설치하라고 지시했다. 이는 민주의원이나 임정 계열의 비상국민회의를 제외하고 별도로 이승만이 주도하는 정치조직이었고, 좌우합작 운동을 무력화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이승만은 이보다 앞서 6월 3일 전국 정읍 연설에서 유명한 단독정부 발언을 했다. 그는 이 연설에서 “우리는 무기 후회된 고위가 재개될 기색도 보이지 않으며 통일 정부를 고대하나 여의치 않으니 우리는 남방만이라도 임시정부 혹은 위원회 같은 것을 조직하여 38선 이북에서 소련이 철퇴 되도록 세계공론에 호소하여야 할 것”이라고 주장해 엄청난 정치적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미소공위가 한창 진행 중이던 4월 6일 AP통신은 미군정 당국이 남조선단독정부 수립을 미 본국에 제의했다고 보도했다. 이러한 제안을 미 국무부와 도쿄의 맥아더사령부는 수용하지 않았다. 이승만의 ‘남선순행’, ‘단정 발언’, 민족통일총본부 결성은 이러한 상황에서 미군정과의 상호교감 속에서 나왔을 가능성이 크다. 좌익은 즉각 반발해 민족통일 총본부를 ‘민족분열총본부’라고 비판했고, 좌우합작파도 우려를 표명했다. 미군정 입장에서 좌우합작 운동은 양날의 칼이었다. 미군정은 미 국무부의 지시로 좌우합작 운동을 지원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좌익세력을 약화하는 수단으로 활용하면서 온건 좌·우파의 합작을 통한 입법기구 수립으로 지지기반을 넓히는 데 주력했다. 하지 중장은 공식적으로는 좌우합작 지지를 선언했지만, 좌우합작 운동의 성공을 기대하지 않고 있었고, 다양한 수단을 동원해 좌익세력 약화에 힘을 쏟았다. 박헌영을 중심으로 하는 좌익세력도 시간이 흐르면서 좌우합작파를 ‘미군정과 결탁한 기회주의자’라고 몰아붙이기 시작했고, 박헌영이 10월 미군정의 체포령을 피해 월북한 후에는 좌우합작 운동을 좌익세력을 분열시키려는 ‘미국의 술책’이라고 비판했다. 특히 조선공산당, 조선인민당, 남조선신민당 등 좌익 3당 합당 과정에서 좌파 내부에 분열이 발생하자 박헌영과 여운형의 갈등은 최고조에 달했다. 결국 좌우합작 운동은 10월에 ‘좌우합작 7원칙’을 발표하는 성과를 냈지만, 좌우의 협공을 받아 좌절되었고, 미군정의 의도대로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을 탄생시키는 것으로 귀결됐다. 좌우합작파는 좌우 대립으로 한반도 정세가 극단적인 방향으로 나아가는 상황에서 좌우의 중간세력을 결집하고 강화하는 것만이 좌초된 미소공위를 재개하고 분단의 위기를 막을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이미 ‘좌우합작 7원칙’이 나올 무렵에는 좌우대립의 골을 메울 수 있는 것이 없을 만큼 좌익과 우익 사이에는 상호비방을 넘어 물리적 충돌과 테러가 빈발하고 있었다. 더구나 애초부터 김규식과 여운형, 미군정은 동상이몽(同床異夢)으로 좌우합작을 추진했다. 한동안 실의와 좌절에 빠져 정계 은퇴까지 선언했던 여운형은 이후 중간 좌파들을 결집해 근로인민당을 결성하고 재차 좌우합작 운동에 나섰지만 1947년 7월 19일 혜화동에서 암살당했다. 좌우합작 운동의 ‘비극적 종언(終焉)’을 알린 사건이었다. 그해 12월 좌우합작위원회는 공식 해체됐다. 정창현 평화경제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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