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7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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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75주년] ⑪1946년 북한, '토지개혁' 격변이 시작되다
11. 북한, 토지개혁 시작으로 급격한 사회개혁 단행 ‘토지는 밭갈이하는 농민에게!’ 이 구호는 1946월 3월, 38선 이북 지역을 환희와 분노로 들끓게 했다. 토지개혁이 시작된 것이다. 그것도 무상몰수(無償沒收), 무상분배(無償分配) 방식이었다. 하루아침에 토지를 공짜로 분배받은 대다수 농민은 ‘황홀한 심정’이었지만 졸지에 토지를 빼앗긴
[광복 75주년] ⑩두 차례 미소공위 결렬, 분단의 길로
9. 미소공동위원회 앞두고 좌·우익 갈려 1946년 3월 20일 뜨거운 관심 속에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서울에서 개최됐다. 1945년 12월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조선 민주주의 임시정부 수립과 이에 협력하는 미소공동위원회(미소공위) 조직 결정에 따른 것이었다. 연합국의 합의로 ‘통일정부’를 구성할 수 있는 기회였다. 미국 아치발드 아놀드(
[광복 75주년] ⑨남과 북 별도 ‘과도정부’ 추진… 분열 가시화
9. 미소공동위원회 앞두고 좌익·우익 갈려 1946년 1월 해방 후 첫 새해를 맞았지만, 국내 정국은 신탁통치 문제로 극심한 혼돈에 빠져 있었다. 그러나 반탁 시위와 모스크바삼상회의 지지 시위에만 몰두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한국의 임시정부 수립과 이를 원조하기 위한 미소 양국 간의 공동위원회 설치를 규정한 모스크바 삼국 외상회의 결정에
[광복 75주년] ⑧정보력 부재로 신탁·반탁 대혼란 초래
8. 정국의 뇌관으로 등장한 신탁통치 논쟁 해방된 첫해가 저물어갈 무렵, 정국을 뿌리 채 뒤흔드는 소식이 전해졌다. 모스크바에서 12월 16일부터 26일까지 열린 미국, 영국, 소련 외무장관회의에서 한반도의 신탁통치가 결정됐다는 엄청난 뉴스였다. 이 회의가 끝난 다음 날인 12월 27일 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 이후 문제들과 관련한 ‘협정문
[광복 75주년] ⑦임정 요인들, 환영식 없이 쓸쓸한 귀국
7. 개인 자격으로 환국(還國)한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들 “나와 나의 각원(閣員) 일동은 한갖 평민의 자격을 가지고 들어왔습니다. 앞으로는 여러분과 같이 우리의 독립완성을 위하여 진력하겠습니다. 앞으로 전국 동포가 하나로 되어 우리의 국가독립의 시간을 최소한도로 단축시킵시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김구 주석은 귀국 다음 날인 11월 24일 경
[광복 75주년] ⑥이승만·김일성 남과 북 해방정국 주역으로
6. 이승만과 김일성의 귀국 해방이 된 지 두 달가량 지난 1945년 10월 중순, 평양과 서울에서는 향후 현대사에 큰 영향을 미친 정치행사가 각각 열렸다. 형식적으로는 조선의 해방을 축하하고 연합국을 환영하는 자리였지만 내용상으로는 해외에서 활동하다 귀국한 김일성(金日成)과 이승만(李承晩)의 ‘국내 정치무대 등장’을 알리는 행사였다. 먼저 모
[광복 75주년] ⑤박헌영·여운형 ‘조선인민공화국’ 시도 물거품으로
5. 해방직후 이남에서 주도권을 장악한 좌익정치세력 해방된 8월 15일부터 미군이 진주하는 9월 초까지 국내 정국(政局)의 주도권은 조선건국준비위원회(건준)를 조직한 여운형(呂運亨)에게 있었다. 8월 말까지 전국적으로 건준 지부들이 빠른 속도로 늘어났다. 우익진영은 정세를 관망하고 있었고, 해외에서 활동하는 지도자들은 귀국이 늦어지고 있었다. 이런 상
[광복 75주년] ④중앙청 일장기 내려지고 성조기 오르다
4. 미군의 서울 입성 1945년 9월 4일 미군 해군기 편대가 인천 상공에 모습을 드러냈다. 미군 상륙을 앞둔 정찰비행이었다. 4일 후인 8일 미군은 해군기의 엄호를 받으며 인천에 상륙했다. 미군은 일본군의 별다른 저항 없이 다음날 서울에 입성했다. 소련군이 평양에 진주한 지 2주일이 지난 시점이었다. 9일 오후 4시, 25분간 조선총독부
[광복 75주년] ③8월26일 소련군 사령관 평양 입성·시가 행진
3. 소련군의 평양 입성 해방 당일 여운형, 안재홍의 주도로 조직된 조선건국준비위원회는 “일시적으로 국제 세력이 우리를 지배할 것이나, 그것은 우리의 민주주의적 요구를 도와줄지언정 방해치는 않을 것”이라고 선언했다. 그러나 예상은 빗나갔다. 그들은 연합국이 진주할 것은 예견했지만 미국과 소련이 서로 다른 정책과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점을 간과했다.
[광복 75주년] 해방 믿지 못해… 군중은 하루뒤 거리로 쏟아졌다
[광복 75주년] 해방정국 3년… 사진에 담긴 환호와 좌절 2. 해방의 기쁨 1945년 8월 16일, 아침부터 조선영화사 직원들은 분주하게 움직였다. 9시 전에 촬영팀과 사진기자는 경성감옥(서대문형무소)으로 갔다. 9시부터 감옥에 수감돼 있는 정치범이 석방될 예정이었다. 형무소 앞에는 이미 많은 인파가 몰렸다. 수감자들이 풀려난다는 소식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