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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지진 1년' 튀르키예 현지서 마주한 한글 티셔츠

등록 2024.02.08 14:39:55수정 2024.02.08 16:3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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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지진 1년' 튀르키예 현지서 마주한 한글 티셔츠


[서울=뉴시스]홍연우 기자 = '긍정을 퍼트려 봐.'

지난 3일(현지시간) 강진 후 1년간의 재건 과정을 취재하러 찾은 튀르키예 말라티아주 예실리우르트의 지진 이재민 임시 거주촌에서 익숙한 언어와 마주했다. 취재진에게 인사를 건네러 걸어온 4살 소녀 미라지가 입은 티셔츠엔 노란색 글씨로 한글 '긍정을 퍼트려 봐'가 큼지막하게 적혀 있었다.

1년 전 대지진으로 삶의 기반을 잃었지만, 폐허 속에서도 이들은 연대와 '긍정의 힘'으로 다시 일어설 준비가 한창이었다. 지진의 상흔이 가득한 도시와 열악한 환경에서도 곧 희망을 마주하리란 기대를 품고 있어서다.

지난 4일과 5일 연이어 찾은 아디야만주 메르케즈와 카흐라만마라슈 엘비스탄에 있는 이재민 임시 정착촌에서도 환한 미소를 마주할 수 있었다. K2 임시 거주지에 세워진 터키 과학기술 워크숍 센터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대학생 데니스는 "나 역시 지진 피해자여서 이곳이 마치 집처럼 느껴진다. 도움이 되고 싶어 자원봉사를 시작했다"며 눈을 빛냈고, 카흐라만마라슈 엘비스탄 토박이인 하티제도 지진 후 고향을 뜨는 대신엘비스탄 임시 거주지에서 이재민들을 위해 일하고 있었다.

임시 거주촌에서 만난 네 아이의 엄마 에미네는 컨테이너에서의 생활이 쉽지 않다고 작은 목소리로 털어놓으면서도 "곧 새로운 집으로 이사갈 날을 기다린다"고 전했다. 기자에게 수줍게 BTS와 블랙핑크의 '포토 카드'를 선물로 건넨 6살 소녀는 "나에게 매우 소중한 물건이지만 새집으로 이사 가면 또 다른 포토 카드를 살 수 있을 테니 우리를 보러와 준 보답으로 선물을 주고 싶었다"고 했다.

튀르키예 사람들은 희망을 품고 있지만, 눈으로 목격한 현실은 아직 녹록지 않았다.

지진으로 피해를 튀르키예 동남부 지역은 환경도시계획부 산하 주택개발공사(TOKI)와 함께 이재민을 위한 영구주택을 건설하고 있지만 '날림 건설'이란 지적에서 자유롭지 않다.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튀르키예 대통령이 "지진 발생 1년 안에 20만 채가 넘는 집을 짓겠다"고 약속한 데다, 다음달 31일 치러지는 지방선거를 앞두고 속도에 신경을 쓰는 기색이 역력해서다. 길면 1년, 빠르면 5개월 내 지어진 집들의 내진 설계가 얼마나 잘 돼 있을진 의문이다.

또 이 영구주택은 대지진 이전 '집주인'만을 위한 것이라 세입자들은 스스로 집을 마련해야 한다. 엘비스탄에서 만난 한 이재민은 '새집에 언제쯤 입주할 수 있냐'는 물음에 "우리 가족은 지진 이전에도 세입자였기 때문에 입주 자격이 없다. 언제까지 이곳에 있어야 할지 모른다"며 말끝을 흐렸다. 그러나 이내 표정을 풀더니 "잊지 않고 이곳을 찾아줘 고맙다"며 기자의 양손을 꼭 잡았다. 그의 손을 마주잡고 있자니 고마움과 무력감이 동시에 느껴졌다.

쉽게 아물지 않는 상처 속에서도 튀르키예 시민들은 삶이 지금보다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의 싹을 틔웠고, 지진 후 1년이란 시간이 흐르며 많은 것이 바뀌었다. 폐허가 된 건물의 잔해 위로 컨테이너촌이 세워졌고, 문을 닫았던 가게들을 하나둘 영업을 시작했다.

그러나 이재민들의 일상이 완전히 '지진 이전'으로 돌아간 것은 아니다. 빌딩 잔해들이 뒤엉켜 있는 공터가 도시 군데군데 자리했고, 아이들은 아직도 악몽을 꾼다. 1년의 시간이 흐르며 국제사회에선 튀르키예 강진도 점차 잊혀져 가고 있지만, 이들은 여전히 지속적인 관심이 필요하다.

튀르키예가 낳은 세계적인 작가 오르한 파묵은 그의 책 '내 이름은 빨강'에서 "재앙을 겪을 때면 사람들은 어리석어 보일지라도 모든 것이 옛날처럼 변함없이 계속되기를 바라곤 한다"고 했다. 하루빨리 튀르키예 시민들이 평온한 일상을 되찾기를 기원한다.


◎공감언론 뉴시스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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