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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주의 건강신호등]어느 당뇨병 환자의 금주

등록 2022.01.10 12:00:00수정 2022.01.24 09:5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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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주의 건강신호등]어느 당뇨병 환자의 금주


[서울=뉴시스]  김현주 이대목동병원 직업환경의학과 교수(이화건강검진센터장)

건강검진 문진을 하다가 접수 직원에게 전달할 일이 있어 잠깐 진찰실 밖으로 나가서 이야기를 하고 다시 들어오는데, 대기 의자에 앉아 있던 어떤 사람이 나를 보고 일어나서 반갑게 인사를 하였다. 얼굴만 봐서는 누군지 알 수가 없다. 일 년 동안 이화건강검진센터를 방문하는 사람이 만 명이 넘다보니 내가 얼굴만 보고 일일이 기억할 수는 없다. 하지만 진찰실에 마주 앉으면 기억이 나곤 한다.
 
그 분 차례가 되자 진찰실에 들어와서 “선생님 덕분에 이제 술도 안 먹고 혈당관리 잘 하고 있어요, 그 때 아버님 이야기까지 하시면서 설명해주셔서 감동을 받았어요”하면서 감사하다는 말을 한다. 아, 맞다. 작년에 건강검진을 받으러 왔을 때 혈당이 몇 년 동안 지속적으로 높은 데 치료를 하지 않고 있었다. 음주 빈도는 주 3회, 1회 음주량은 소주 2명이었고 운동은 하지 않는다고 문진지에 적혀있었다.

대화를 나누다 보니 당뇨병에 대해서 이런 저런 지식은 있지만 치료를 받을 의지는 없었다. 그래서 진지하게 우리 아버지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었다. 1년에 한두 번 있을까 말까 한 일이다. 아버지를 떠올릴 때는 ‘그 때 의대생이던 내가 좀 더 신경을 썼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후회가 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누군가의 아버지, 어머니인 사람이 정말 ‘몰라서’ 치료를 하지 않는 상황을 만났을 때, 설득이 꼭 필요할 때 아버지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 

건강검진에서 당뇨병을 잘 관리하지 않는 사람들을 만날 때 마다 아버지 생각이 나곤 한다. 우리 아버지는 당뇨병을 잘 관리하지 못해 그 합병증으로 일찍 돌아가셨다. 지금의 나보다 겨우 몇 살 더 많은 나이였다. 전국민 건강보험도 없던 시절, 지금은 누구나 누리는 국민건강검진도 없던 시절이었다. 아버지는 누군가에게 당뇨병을 잘 관리해야 하는 이유를 제대로 설명 받은 적이 있었을까?

얼마 전 일터 건강을 지키는 직업환경의학과 의사회 온라인 모임방에, 혈당이 거의 500mg/dL에 육박하는 노동자를 만났을 때의 막막한 심경을 토로하는 글이 올라왔다. (공복혈당의 정상 기준은 100mg/dL 미만, 당뇨병 기준은 126mg/dL이상)

참으로 열악한 사업장들이 모여있고, 거기서 일하는 사람들은 의료보험이 없거나, 있어도 병원에 갈 시간도 없고, 바빠서 건강검진도 정기적으로 받지 못하고, 당뇨병을 진단받아도 왜 관리해야 하는지 제대로 된 설명을 듣지 못한다. 1980년대의 우리 아버지 상황과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뇨병은 초기에 증상이 없지만 혈당을 적절하게 관리하지 못하고 오랜 기간 방치하면 심각한 합병증이 발생하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관리해야 하는 질환이다. 당뇨병이 있으면 심근경색의 고위험군이다. 그뿐 아니라 만성 신장질환이나 백내장이나 망막증 등의 합병증으로 인해 노년기 삶의 질을 크게 저하시킨다. 만성 신장 질환으로 콩팥이 완전히 망가지면 인공신장실을 일주일에 세 번 방문해서 네 시간씩 투석을 하면서 삶을 유지해야 한다.

당뇨병성 망막증은 사실상 치료가 없기 때문에 실명에 이른다. 당뇨병성 말초신경병증이 발생하면 감각이 무디어지기 때문에 발에 상처가 나도 모르고 있다가 감염이 발생하여 발을 절단하는 일도 있다. 이를 당뇨발이라도 부른다.

이렇게 무서운 당뇨병이지만 예방할 수 있는 질환이라는 점은 다행스럽다. 질병이 생겨도 잘 관리하면 합병증을 막을 수 있다. 국가건강검진 항목에 공복혈당이 포함되어 있어 비사무직 노동자는 매년 검사를 받고, 그 밖의 사람들은 격년으로 검사를 받기 때문에 당뇨병을 조기발견하여 적극 관리하면 이러한 합병증을 예방할 수 있다.

하지만 당뇨병의 관리는 어렵다. 식이요법이 특히 어렵다. 어떤 분들은 맛있는 것을 먹고 즐겁게 살다가 빨리 죽는 게 더 낫다고 하신다. 검진을 하다 보면 당뇨병을 오랫동안 치료를 하는데 혈당이 관리가 잘 안 되는 분들을 만나기도 하는데, 술을 마시는 경우가 특히 그렇다. 주치의와 이 문제에 대해서 이야기하느냐 물어보면, 주치의한테는 이야기하지 않는다는 사람도 있고, ‘주치의도 이젠 뭐라하지 않는다’는 사람도 있다. 그럴 때 물어보곤 한다. 왜 치료받지 않는지, 왜 생활습관을 개선하지 않는지. 저마다의 이유가 있었다.

내가 진찰실에서 할 수 있는 건 두 가지이다. 하나는 당뇨병을 치료해야 하는 이유를 제대로 차근차근 설명해주는 것이다. 두 번째로, ‘이대로 살다가 죽으면 되지’ 하시는 분들에게 질문을 한다. 그렇게 되어 만약 죽으면 차라리 다행인데, 남은 인생을 아파서 누워서 지낼 수도 있다는 점을 생각해보았는지. 

당뇨병뿐 아니라 건강검진에서 발견된 질병을 방치하는 분들 중에는 삶이 힘겨운 분들이 많다. 그 분들에게 ‘몸’은 유일한 자원이다. 유일한 자원을 잘 관리해야 지금보다 더 비참한 삶이 되는 것을 방지할 수 있다. 긴 대화를 나눈 뒤 몇 명은 변화된 상태로 다음 번 검진에서 다시 만난다. ‘건강검진의사 하길 잘 했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순간이다. 

때로는 건강검진의사가 얼마나 무력한가를 느끼기도 한다. 예를 들면 당뇨병이 관리가 잘 안 되는 사람이 당뇨병의 합병증인 ‘심근경색’의 직업적 고위험 작업인 야간작업을 할 수밖에 없는 노동자인 경우를 만날 때이다. 산업안전보건법은 질병자를 적성 배치하도록 하고 있다. 작업 전환 조치를 통해서 질병자를 적성배치해서 질병관리가 개선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언제나 가능한 것은 아니다.  

언젠가 본 TV 공익광고에서 어느 부부가 바다 속 쓰레기를 줍고 있었다. ‘그런다고 바다가 깨끗해지냐’는 질문에 “그래도 우리가 지나온 길은 변화가 있잖아요”라고 답한 장면이 기억에 남는다. 내가 하는 검진도 비슷한 면이 있어 공감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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