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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희는 무엇을 노렸나?[삼성 프랑크푸르트 선언 30주년①]

등록 2023.06.05 08:00:00수정 2023.06.12 09:2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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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6월7일 사장단·임원진 모아 '신경영' 선언

"이대론 잘해야 1.5류…마누라·자식 빼고 다 바꾸자"

라인스톱제 도입…휴대폰 15만대 불태우기도

【수원=뉴시스】 1993년 신경영 선언 당시. (사진=삼성전자)

【수원=뉴시스】 1993년 신경영 선언 당시. (사진=삼성전자)

[서울=뉴시스]이현주 기자 = "삼성은 자기 자신의 못난 점을 알지 못한다. 이대로 가다간 망할지도 모른다는 위기를 온몸으로 느끼고 있다."

삼성의 고(故) 이건희 선대회장은 1993년 2월 삼성전자 관계사 임원들이 참석한 가운데 미국 LA에서 전자부문 수출상품 현지 비교 평가 회의를 주재했다. 삼성이 잘 만든다고 자부하는 제품들이 세계 최대 시장인 미국에서 어떤 대우를 받고 있는지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자는 취지였다.

현지 매장에서 삼성 제품은 고객 외면으로 한쪽 구석에 먼지를 뒤집어 쓴 채 놓여 있었다. 이 회장은 "삼성이란 이름을 반환해야 한다"며 "한쪽 구석 먼지 구덩이에 처박힌 것에 왜 삼성이란 이름을 쓰느냐"고 말했다.

1993년 6월 4일. 이 회장은 일본 도쿄에서 삼성의 경영 현장을 지도해 온 일본인 고문들과 삼성이 지닌 문제점에 대해 회의를 했다. 새벽까지 이어진 회의에서 이 회장은 일류 상품에 대한 고민을 털어놨다.

200명 임원진 프랑크푸르트로 소집…"다 바꾸자"

프랑크푸르트에 도착한 이 회장은 또 다른 충격을 받았다. 세탁기 조립 라인에서 직원들이 세탁기 덮개 여닫이 부분 규격이 맞지 않자 즉석에서 덮개를 칼로 깎아 조립하는 모습이 담겨 있는 사내방송 비디오테이프를 봤기 때문이다.

6월 7일, 마침내 이 회장은 비장한 각오로 임원과 해외주재원 등 200여명을 프랑크푸르트 캠핀스키 호텔로 불러 새로운 삼성을 여는 회의를 주재했다. 일명 '프랑크푸르트 선언'이다.

[서울=뉴시스]박주성 기자 = 1993년 신경영 선언 당시 사진. (사진=삼성전자 제공). 2020.10.25. 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박주성 기자 = 1993년 신경영 선언 당시 사진. (사진=삼성전자 제공). 2020.10.25.  [email protected]

이 자리에서 그는 "삼성은 이제 양 위주의 의식, 체질, 제도, 관행에서 벗어나 질 위주로 철저히 변해야 한다"며 삼성 신경영을 선언했다. 이어 "국제화 시대에 변하지 않으면 영원히 2류나 2.5류가 된다. 지금처럼 잘해봐야 1.5류"라며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꾸자"고 강조했다.

이 회장은 "20년이 넘도록 '불량은 암'이라고 말해왔다. 위궤양은 회복되지만 암은 진화한다"고 했다. 이어 "초기에 잘라내지 않으면 3~5년 뒤에 온몸으로 전이돼 사람을 죽인다"며 위기의식을 드러냈다.

그는 "삼성은 자칫 잘못하면 암의 말기에 들어갈 가능성이 있다"며 "암은 초기에 수술하면 나을 수 있으나 3기에 들어가면 누구도 못 고친다"고 삼성에 만연한 양적 사고를 경고했다.

그는 특히 "양과 질의 비중을 5대 5나 3대 7 정도로 가자는 것이 아니다. 아예 0대 10으로 가자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질을 위해서라면 양을 희생시켜도 좋다. 제품과 서비스, 사람과 경영의 질을 끌어올리기 위해 필요하다면 공장이나 라인의 생산을 중단해도 좋다"고 강조했다.

이에 삼성은 불량을 없애는 제품의 질부터 혁신을 시작했다. 생산라인을 중단시키더라도 불량을 선진 수준으로 낮추도록 했다. 한 품목이라도 좋으니 세계 제일의 제품을 만들기로 했다.

이 회장은 당시 삼성전자의 현 주소에 대해 "생산 현장에 나사가 굴러다녀도 줍는 사람이 없는 조직이 삼성전자"라며 "3만명이 만들고 6000명이 고치러 다니는 비효율, 낭비적이고 무감각한 회사"라고 질타했다.

[서울=뉴시스]박주성 기자 = 2013년 신경영 20주년 만찬 사진. (사진=삼성전자 제공). 2020.10.25. 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박주성 기자 = 2013년 신경영 20주년 만찬 사진. (사진=삼성전자 제공). 2020.10.25.  [email protected]

라인스톱제·휴대폰 화형식 등 실천 옮겨

프랑크푸르트 선언 이후 품질을 최우선으로 불량을 뿌리 뽑기 위한 조치들이 잇따랐다. 대표 사례가 '라인 스톱' 제도다.

생산 현장에서 불량이 발생할 경우 즉시 해당 생산라인의 가동을 중단하고 제조과정의 문제점을 완전히 해결한 다음 재가동함으로써 문제 재발을 방지하는 혁신 제도다.

이 라인 스톱제를 가장 먼저 도입한 곳은 삼성전자 수원사업장 세탁기 생산라인이었다. 세탁기 생산라인은 프랑크푸르트 선언 후 곧바로 라인을 스톱해 불량 원인을 파악하고, 문제점을 해결한 후 다시 가동에 들어갔다.

세탁기 라인에서 시작한 라인 스톱제는 곧바로 전자 관계사의 모든 사업장으로 확산됐다. 전자제품의 경우 1993년의 불량률이 전년도에 비해 적게는 30%, 많게는 50%까지 줄었다.

라인 스톱제와 함께 질 위주로 가기 위한 삼성의 뼈를 깎는 의지를 보여 준 사례가 1995년 3월에 있었던 '애니콜 화형식'이다.
[서울=뉴시스]1995년 3월9일 삼성전자 불량 무선전화기 화형식. (사진 = 업체 제공) 2023.6.2. photo@newsis.com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뉴시스]1995년 3월9일 삼성전자 불량 무선전화기 화형식. (사진 = 업체 제공) 2023.6.2. [email protected] *재판매 및 DB 금지

당시 삼성전자의 무선전화기 사업부는 품질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상태에서 무리하게 완제품 생산을 추진하다 제품 불량률이 11.8%까지 올라가는 심각한 문제를 드러냈다.

이 회장은 "신경영 이후에도 이런 나쁜 물건을 만들고, 엉터리 물건을 파는 정신은 무엇인가"라며 "적자 내고 고객으로부터 인심 잃고 악평을 받으면서 이런 사업을 왜 하냐"고 지적했다.

1995년 1월 이 회장은 품질사고 대책과 향후 계획을 점검하면서 고객들에게는 사죄하는 마음으로 무조건 새 제품으로 교환해주는 특단의 조치를 취했다. 이와 함께 수거된 제품을 소각함으로써 임직원들의 불량 의식도 함께 불태울 것을 제안했다.

15만대, 150여억원 어치의 제품이 수거됐고, 화형식을 통해 전량 폐기 처분됐다. 이런 가시적 조치와 노력을 통해 '불량은 암'이라는 인식이 삼성인들 가슴 속에 깊이 자리 잡았다.


◎공감언론 뉴시스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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