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등, 중재로 풀자②]소송공화국 원인은…신속·저렴한 절차의 '역설'
평균 재판기간 290일…미국·영국은 400일 넘어
신속하면서 소송비용까지 선진국들 비해 저렴
"아무리 봐도 소송 갈 사안이 아닌데 법정으로"
"법원 문턱 낮아 판사들 피로감 극에 달한 상태"
"중재·화해 등 소송 외적인 방법으로 유도 중요"
【서울=뉴시스】김현섭 기자 = "새벽 2시 이전에 잠을 자 본 날이 얼마나 되려나. 일의 양이 엄청났어요. 하루하루 피로감이 극심했죠. 매순간 최선을 다했다고 자부하지만 솔직히 나 자신도 모르게 대강 마무리 지은 소송은 없는지 항상 마음에 걸려요. 당사자들에겐 인생이 달린 것일 수 있는데."
판사 출신인 한 로펌 변호사의 소회다. 그의 경험담은 '소송 공화국'의 위험성을 압축해 보여주고 있다. 112 허위·장난 신고가 하나 둘 쌓이면 1분, 1초라도 빨리 경찰 도움이 필요한 누군가에게 피해가 가듯, 남발되는 소송은 결국 소송 당사자들의 피해로 돌아간다.
2일 법조계에 따르면 전문가들은 소송이 넘쳐나는 현상의 원인으로 각종 중재 제도에 대한 홍보 부족과 함께 대한민국이 유난히 '소송하기 편한 나라'라는 점을 꼽는다.
우리나라의 소송 편리성은 인구 1000만명 이상의 주요 국가들과의 비교 통계를 통해 객관적으로 드러난다.
세계은행이 지난 10월 발표한 '기업환경평가 보고서(Doing business 2018)' 민사 사법제도 부문을 보면 우리나라의 평균 재판 기간은 290일이다.
반면 독일은 499일, 영국 437일, 미국 420일, 프랑스 395일이다. 우리나라와 인접한 중국은 496일, 일본은 360일이다.
선진국들에 비해서도 우리나라의 재판 진행 속도가 매우 빠름을 알 수 있다.
시간 뿐만 아니라 비용, 편리성 면에서도 대한민국은 두드러진다.
우리나라의 '소가 비용 대비 소송비용' 비율은 12.7%다. 쉽게 말해 소송을 통해 얻은 이익의 약 10% 정도를 소송 비용으로 썼다는 뜻이다.
이는 영국(45.7%)의 3분의 1 수준이며, 미국(30.5%)의 절반도 되지 않는다. 일본 23.4%, 프랑스 17.4%, 중국 16.2%, 독일 14.4%로 우리나라보다 높다.
물론 신속·저렴함은 그 자체로 소송 당사자가 누리는 이익이 되기 때문에 고무적이다. 실제로 우리나라는 이 보고서에서 법적 분쟁(민사) 해결 부문 1위를 차지했다.
서초동의 한 변호사는 "사법제도에 있어서는 둘째 가라면 서러울 정도의 선진국"이라며 "동남아나 유럽에서 배우러 올 정도"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편리함으로 인한 서비스 수요의 양적 증가는 언제든지 제공 콘텐츠의 질적 저하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양날의 칼'이기도 하다.
검사 출신 한 변호사는 "우리나라가 주요 국가들에 비해 소송 기간이 짧고 돈이 덜 드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면서 질도 떨어지지 않기 때문에 사법 선진국이라는 건 현재로만 놓고 본다면 맞다"며 "하지만 전망의 관점에서 본다면 다소 회의적이다. 지금처럼 소송 급증을 주체하지 못하는 상황이 계속 이어진다면 부작용은 생기게 돼 있다"라고 진단했다.
서초동의 다른 변호사도 "어쩔 땐 아무리 봐도 소송까지 갈 게 아닌 사안을 가지고 굳이 법정에서 해결하겠다며 찾아온다. 헛돈 쓰지 마시라고 말려도 소용이 없다"며 "억지로 소송을 시작해 법정에 가면 판사 표정부터 다르다. 판사들도 정작 소송다운 소송에 들여야 할 시간을 빼앗기니 짜증이 안 나겠느냐"고 말했다.
재경지법 한 판사는 "법원 문턱이 낮다보니 소송이 남발돼 판사들 피로감이 극에 달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분쟁 해결에 국가의 힘을 빌리는 것도 국민 권리인데 무조건 소송 절차를 어렵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라며 "가급적 중재, 화해 같은 소송 외적인 방법이 자연스럽게 이용될 수 있도록 관련 제도가 제대로 갖춰지고 널리 알려져야 하는 게 그래서 중요하다. 그리고 그게 더 국민들에게 이익"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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