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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홉 형제 중 홀로 생존"…70여 년 동안 오지 않는 '아버지·어머니'

등록 2025.04.03 09:2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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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7주년 제주4·3 희생자 추념식

행방불명인 묘역 유족 발길 이어져

[제주=뉴시스] 우장호 기자 = 제77주년 제주4·3 추념식일인 3일 오전 제주시 봉개동 제주4·3평화공원 행방불명인 묘역에서 희생자 유족강방자씨가 아버지 고 강윤식 표석 앞에서 제를 지내고 있다. (제주도사진기자회) 2025.04.03. woo1223@newsis.com

[제주=뉴시스] 우장호 기자 = 제77주년 제주4·3 추념식일인 3일 오전 제주시 봉개동 제주4·3평화공원 행방불명인 묘역에서 희생자 유족강방자씨가 아버지 고 강윤식 표석 앞에서 제를 지내고 있다. (제주도사진기자회) 2025.04.03. woo1223@newsis.com

[제주=뉴시스] 오영재 기자 = "아홉 형제 중 막내로 태어나 여태까지 홀로 살아남았어요."

4일 오전 8시 제주시 봉개동 제주4·3평화공원 내 행방불명인 묘역. 쌀쌀하고 강한 바람이 부는 와중에도 4·3유족들은 이름 석 자가 적힌 희생자 비석 앞에 앉아 제를 지내고, 눈물을 훔치기도 하고, 무언의 대화를 나눴다.



유족들은 70여 년 동안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를, 행방불명된 아버지와 어머니, 형제자매들을 그리워했다.

이날 묘역에서 만난 강방자(83·여)씨는 아버지인 희생자 고 강윤식을 찾아 제를 지냈다. 그는 "아홉 형제 중 막내로 태어나 여태까지 홀로 살아남았다. 아버지는 내가 6살 때 농사를 짓다가 군경에 끌려갔다고 들었다. 이후 마포형무소로 갔다는 것만 안다"고 회상했다.

강씨는 "여덟 자식이 갓난아기때 죽고 여섯 살 난 딸을 두고 가는 아버지 마음이 어떻겠나. 끌려갈 만한 이유도 없었다"며 "그때는 젊은 사람이면 모두 잡아갔으니 우리 집안도 마찬가지였다. 사촌 오빠 2명도 행방불명돼 여기 어딘가에 있다"고 설명했다.



서귀포시 대정읍 모슬포에서 왔다는 이철수(79)씨는 행방불명된 부모님 고 이정우·강두희를 찾았다. 이씨는 "내가 두살 때였는데, 밭을 갈고 있던 아버지는 군경이 와보라고 해서 갔다가 그대로 잡혀갔다"며 "할머니가 아버지를 찾아다니셨고, 수소문 끝에 거제형무소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면회를 갔다"고 전했다.

그는 "할머니가 아버지를 만났는데, '추우니 겉옷을 갖다 달라'고 하셨다. 할머니가 제주도로 와서 다시 겉옷을 챙기고 형무소로 갔는데 며칠 만에 형무소 창고에 불이 나 모두 타버렸다. 아버지는 만나지 못했고, 지금까지 소식이 없는 상태"라고 전했다.

희생자 고 고두식의 아들 고대익(82)씨는 "농사를 짓던 아버지는 폭도들 때문에 산속으로 도망갔다가 토벌대에 잡혀갔다"며 "정뜨르비행장에서 재판을 받았는데 당시 함께 잡혀갔던 분들은 모두 무죄를 받았다. 마을로 돌아온 남자들이 '내일 모레쯤이면 올거다'라고 했는데, 여순사건(10·19 사건)이 터지면서 갑자기 '다 죽여라' 명령이 떨어졌다고 한다"고 전했다.

고씨는 "아버지는 산속에서부터 친구랑 함께 다니셨다. 정뜨르비행장에서 유해가 발견됐을 때에도 친구랑 꼭 붙어서 발견되셨다"고 말했다.

[제주=뉴시스] 우장호 기자 = 제77주년 제주4·3 추념식일인 3일 오전 제주시 봉개동 제주4·3평화공원 행방불명인 묘역에 희생자 유족들의 발걸음이 이어지고 있다. (제주도사진기자회) 2025.04.03. woo1223@newsis.com

[제주=뉴시스] 우장호 기자 = 제77주년 제주4·3 추념식일인 3일 오전 제주시 봉개동 제주4·3평화공원 행방불명인 묘역에 희생자 유족들의 발걸음이 이어지고 있다. (제주도사진기자회) 2025.04.03. woo1223@newsis.com

서귀포시 효돈동에서 온 고경숙(77·여)씨는 아버지 고 고신평씨의 묘비 앞에서 제를 지내고 있었다. 그는 "아버지는 집에 계시다가 갑자기 잡혀갔고 그것으로 행방불명됐다"며 "어디 형무소에 갔다는 얘기도 없고, 재판을 받은 것 조차 소식이 없다"고 했다.

이어 "최근 법이 바뀌고 하면서 재심을 통해 무죄를 받는데 시청이나 이런 데서도 연락을 받아보지 못했다. 유족 보상금도 받지 못했다. 그저 제사를 지내고만 있다"고 말했다.

4·3평화공원에는 4000여기의 행방불명인 묘역이 조성돼 있다. 70여 년 전 4·3의 광풍이 불었을 당시 산과 들에서, 깊은 바다에서, 육지 형무소에서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진 이들이다. 시신조차 수습되지 못해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지 못한 이들의 넋을 기리기 위한 표석들로 가득차 있다. 매년 4월3일이면 희생자 유족들은 이곳에서 넋을 기린다.

제주4·3은 1947년 3·1절 발포사건을 기점으로 1948년 4월3일 무장봉기로 촉발, 1954년 9월21일까지 7년여 동안 수많은 양민들이 총살 또는 행방불명된 사건이다. 공식 집계된 희생자 수는 1만4000여명이다. 비공식적으로는 2만5000∼3만여 명 사이로 추정되고 있다. 한국 현대사에서 6·25전쟁 다음으로 가장 많은 인명 피해를 낳았다.

이날 오전 10시를 기해 제주시 봉개동 제주4·3평화공원에서 희생자들의 넋을 기리는 제77주년 제주4·3 희생자 추념식이 거행된다. 올해 추념식은 '4·3의 숨결은 역사로, 평화의 물결은 세계로'를 주제로 열린다.


◎공감언론 뉴시스 oyj4343@news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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