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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다시 쓰는 춘향전] ② 작가는 무명씨?…조선 대문호 작품

등록 2016.08.30 08:00:18수정 2016.12.28 17:3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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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남 장군 초상화

조경남 장군 초상화

【봉화=뉴시스】 김진호 기자 = 전북 남원시 동쪽에 이백면이 있다.

 동으로는 백두대간 지리산, 서쪽으로는 섬진강의 상류인 요천강이 흐른다. 구례, 운봉, 장수로 통하는 길목이다. 이 때문에 조선시대 교통통신 제도인 역참이 설치됐던 군사적 요충지다. 이곳이 유학자이면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당시 의병장이었던 산서(山西) 조경남(趙慶男 1570~1641) 장군의 고향이다.

 설성경 연세대 명예교수는 1999년 여러 문헌을 통해 조경남 장군이 '춘향전'의 원작가 임을 밝혀냈다. 장군은 1570년 남원군 주천면 내송리(당시 남원도호부)에서 태어났다. 6세 때 아버지 조벽, 13세 때 어머니가 세상을 뜨자 이때부터 외조모를 봉양하며 생활했다.

 임진왜란 당시 순국한 의병장 조헌의 수제자이기도 하다. 17세에 조헌 문하생으로 입학해 성리학의 오의를 통달해 그의 수제자로 인정받았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는 스승처럼 적과 맞서 싸우며 왜병을 직접 격퇴한 무패의 의병장이다. 23세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그 해 8월 가산을 풀어 모집한 의병 500여 명을 이끌고 운봉 팔랑치 첫 싸움에서 왜적 100여 명을 전멸시켰다.

 이어 육십령 전투에서의 승전을 비롯해 정유재란 때 불우치 매복전, 궁장동 혈전, 하동 추격전, 탄음과 산음의 화공전 등 크고 작은 10여 차례의 전투에서 왜적 수천 명을 섬멸하며 호남을 지킨 명장이다.

 왜적을 속이고 지형지물을 최대한 이용한 병법과 용병술로 혁혁한 전공을 세우면서도 단 한차례 패한 적이 없다. 부하들도 한 명의 희생이 없어 당시 '제갈공명의 환생'이라 불렸다. 이 같은 공적을 인정해 조정에서 호조참의(정3품) 벼슬을 내렸지만 그는 끝내 사양했다.

남원시와 그의 후손들이 1986년부터 기금을 모아 정비한 남원시 이백면 초촌리 소재 조경남 장군의 사당 '의충사(義忠祠)'를 12대 손 조영진(67·남원시)씨가 둘러보고 있다.

남원시와 그의 후손들이 1986년부터 기금을 모아 정비한 남원시 이백면 초촌리 소재 조경남 장군의 사당 '의충사(義忠祠)'를 12대 손 조영진(67·남원시)씨가 둘러보고 있다.

 병자호란으로 나라가 또다시 위태롭게 되자 67세의 노령을 무릅쓰고 의병을 모아 청주까지 진격했다. 인조가 청에게 항복하는 바람에 통분하며 되돌아 왔다.

 난중잡록(亂中雜錄)은 장군이 57년 동안 국내 중요 사실을 일기 형식으로 기록한 서책이다. 직접 체험한 전쟁 종군기이기도 하다. 몸소 견문한 정치, 문화, 사회상을 가식이나 과장 없이 광범위하게 기술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에 대해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보다 폭넓게 다루고 있다. 이괄의 난, 정묘·병자호란 등 중요 사건과 풍속, 민간생활 등을 상세하게 적어놓아 귀중한 역사적 자료로 평가된다. 1649년(인조 27) 선조실록 수정청에서 난중잡록을 빌려다가 8년간이나 참고 사료로 활용했다. 이후 16권 한 벌로 필사해 규장각에 보관하고 나서야 1657년(효종 8) 원본을 되돌려 받았다고 한다.

 장군은 생전에 많은 책을 썼다. 난중잡록 이외도 성리학 주석 3권, 윤리변 5권, 오상통론과 소견록 각 1권의 저서가 전했으나 화재로 모두 소실됐다. 때마침 첨지중추부사 최시옹이 빌려간 난중잡록 8권만이 현재 남아 있을 뿐이다.

 평생을 남원에서 생활한 장군은 남원에 대한 이해와 자긍심을 바탕으로 '춘향전'을 썼다. 물론 소설 속 대표 공간은 남원과 광한루로 설정했다. 소설 속 주인공인 이몽룡은 자신의 제자이자 암행어사를 지낸 성이성을 모델로 삼았다.

 성이성은 남원부사가 된 아버지를 따라와 1607년부터 4년간 남원에서 소년시절을 보냈다. 이 때 장군 밑에서 수학했다. 이 소년은 그 후 1639년 암행어사가 돼 1차로 남원에 와 스승을 만났다.  

남원시와 그의 후손들이 1986년부터 기금을 모아 정비한 남원시 이백면 초촌리 소재 조경남 장군의 묘를 12대 손 조영진(67·남원시)씨가 둘러보고 있다.

남원시와 그의 후손들이 1986년부터 기금을 모아 정비한 남원시 이백면 초촌리 소재 조경남 장군의 묘를 12대 손 조영진(67·남원시)씨가 둘러보고 있다.

 장군은 '춘향전' 속 이몽룡의 부친인 성안의 남원부사와도 교류했다. 최초의 야담집을 남긴 유몽인과도 교유했다. 그와 가까운 인맥에는 암행어사 노진, 윤계선, 그리고 제자 성이성이 있었다. 설 교수는 장군이 이러한 다양한 선택의 여세를 몰아 제자 성이성 암행어사의 출세담과 그를 통해 입수한 각 지역 수령들의 횡포와 타락을 소재로 '춘향전'을 창작한 것으로 추정한다.

 장군은 지리산 동쪽 초입인 남원 내송리에 자신의 보금자리를 틀고 살았다. 인근 지리산 명승지를 두루 찾으며 뜻 맞는 문인들과 교류하며 풍류를 즐겼다. 장군은 1641년 5월 72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사림의 건의로 사헌부 지평, 승정원 좌승지(정3품), 호조참판(종2품)에 추증됐다.

 현재 남원시 이백면 초촌리에는 1986년부터 남원시와 그의 후손들이 기금을 모아 정비한 사당 의충사(義忠祠)와 묘가 있다. 난중잡록은 후손들이 보관하다 현재는 남원시 향토박물관에 위탁보관 중이다.

 그의 12대 손 조영진(67·남원시)씨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당시 남원은 물론 인근 지역 곳곳에서 왜적을 섬멸했던 장군의 일화가 '조 장군 이야기'로 불리며 지금까지 전해 내려온다"고 말했다.  

 지난해 3월 지역 군부대인 육군 제35사단 신병교육대대는 장군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부대 이름을 '조경남 대대'로 명명하는 현판식을 가졌다. 주천면 은송리에 있는 생가는 아직 복원되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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