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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100주년 '서훈3등급' 유관순 열사 제대로 평가받고 있나

등록 2019.01.07 06: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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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뉴시스】 2019년 1월의 독립운동가 유관순 선생. (독립기념관 제공)

【천안=뉴시스】 2019년 1월의 독립운동가 유관순 선생. (독립기념관 제공)

【천안=뉴시스】이종익 기자 = 대한민국은 올해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았다.

미국 뉴욕주에서는 3·1운동의 상징적 인물인 유관순 열사를 기리는 추모의 날이 제정될 것으로 보인다. 뉴욕주 의회가 오는 14일 주 상·하원 합동회의(Joint Session)에서 '유관순의 날' 제정 결의안을 채택할 예정이기 때문이다.

앞서 미국 일간 뉴욕타임스(NYT)는 지난해 3월 29일 세계여성의 날을 맞아 세계적 여성 15명의 삶을 재조명하며 "일제에 저항한 한국의 독립운동가"라며 유 열사를 추모하는 장문의 '부고 기사'를 실었다.

하지만 국내에서 유 열사는 공적에 비해 서훈 등급이 3등급으로 저평가돼 서훈 등급 상향과 함께 재조명해야 한다는 여론이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유관순 열사 서훈 3등급 "명확한 이유가 없다"

5일 국가보훈처에 따르면 3등급의 유 열사 서훈 결정은 1962년에 이뤄졌다. 현행 상훈법상 건국훈장은 공적에 따라 1∼5등급으로 나뉜다. 서훈 1등급(대한민국장)에는 김구·안창호·안중근 등 30명이, 서훈 2등급(대통령장)은 신채호·신돌석·이은찬 등 93명, 유 열사는 김도현·김마리아 등 823명과 함께 서훈 3등급(독립장)으로 분류돼 있다.

유 열사는 1962년 포상 당시 활동 내용과 순국, 독립운동사에 끼친 영향을 등을 종합해 건국훈장 3등급인 독립장을 받았다는 것이 국가보훈처의 설명이다.

그러나 유 열사의 발자취를 후손에 제대로 인식시키고 올바른 예우를 위해 올해 3·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서훈 1등급 '대한민국장'으로 높여야 한다는 요구가 높아지고 있다.

유관순열사기념사업회 류정우 회장은 "유 열사의 서훈등급이 결정된 명확한 이유를 찾기 어렵다"며 "유 열사가 건국훈장을 받을 당시 규정으로는 서훈등급이 세 개 등급뿐이었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낮은 3등급을 받은 것”이라고 지적했다.

류 회장은 이어 "유 열사가 3·1운동의 꽃이자 민족의 누나로 추앙받는 사실을 고려해 볼 때 서훈 3등급은 유 열사의 활동과 정신을 되새기고자 하는 의지가 얼마나 빈약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3·1운동 100주년 '서훈3등급' 유관순 열사 제대로 평가받고 있나

◇유관순 열사 서훈 상향 여론 높아

유 열사의 고향인 천안지역에서는 유 열사의 공적과 비폭력 독립운동사에서 상징적인 여성 운동가라는 점을 고려할 때 3등급의 서훈을 격상시켜야 한다는 여론이 매우 높다.

천안시의회는 최근 "유 열사는 '3·1운동의 꽃'이자 '3·1독립만세운동의 상징'이지만, 3등급의 서훈 등급은 유 열사의 공적에 비해 현저히 낮게 평가됐다"며 유 열사의 서훈 등급 상향을 위한 '상훈법 개정 촉구 건의문'을 만장일치로 채택했다.

구본영 천안시장도 "어린 나이에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유 열사의 서훈이 3등급에 머문다는 것은 그녀의 독립운동 위업을 제대로 평가하지 않은 것"이라며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유 열사의 공적이 올바른 역사적 평가를 받기 위해서는 유 열사의 서훈 등급 상향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국가보훈처는 유 열사의 서훈 등급 상향 가능성에 대해 "상훈법(제4조)에 같은 공적에 대해 중복 포상을 할 수 없도록 규정돼 훈격 재심사를 위해서는 법 개정이 필요하다"고 답변했다.

1902년 충남 천안에서 5남매 중 둘째로 태어난 유 열사는 1919년 3월 1일 학생 시위대와 함께 만세운동 한복판으로 뛰어들었다.

그는 1919년 3월 15일 조선총독부의 임시휴교령으로 학교가 문을 닫자, 고향에서의 만세운동 추진을 위해 독립선언서를 들고 천안으로 향했고, 같은 해 4월 천안 아우내 장터 만세운동을 주도한 3·1운동의 대표적 인물이다.

당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던 중 유관순의 부친 유중권을 비롯한 19명이 목숨을 잃고 유 열사와 시위 주동자들은 천안헌병대로 압송됐다.

이후 서대문형무소로 이감된 유 열사는 갖은 고문과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계속해서 옥중 만세를 불렀으나, 고문 후유증과 영양실조로 1920년 9월 28일 19살의 나이로 순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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