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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언의 책과 사람들]스타 평론가는 왜 펜을 꺾었나…‘영화와 글쓰기’

등록 2022.11.05 06: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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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 영화와 글쓰기 (사진=한상언 영화연구소대표 제공) 2022.11.01. 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 영화와 글쓰기 (사진=한상언 영화연구소대표 제공) 2022.11.01. [email protected]


[서울=뉴시스] 천안의 책방 ‘노마만리’에서는 지난 8월부터 매주 금요일 저녁마다 ‘천안, 영화를 읽다’라는 이름의 영화강좌를 해 오고 있다. 첫 번째 주제는 ‘한국독립영화’에 대한 다섯 개의 강의였고 두 번째 주제는 ‘영화잡지’에 대한 마찬가지의 다섯 개의 강의였다.

이효인, 이진숙, 문관규, 이수정, 심혜경 등이 강사로 나선 ‘한국독립영화’에 관한 강좌도 그러했지만 1950-60년대 영화잡지를 직접 만들었던 영화평론가 김종원 선생을 위시해 ‘씨네21’ 창간을 진두지휘했던 창간 편집장인 조선희 작가, ‘키노’ 창간 편집장인 정성일 영화평론가, ‘스크린’의 마지막 편집장인 김형석 평창영화제 부집행위원장, 학술적 비평과 저널리즘 비평의 경계에서 꾸준한 평론활동을 해 오고 있는 강성률 영화평론가, 영화잡지를 연구하고 있는 이선주 교수가 맡은 영화잡지에 관한 강연은 여느 영화강좌에서 볼 수 없는 화려한 강사진을 자랑했다.

강좌를 주최한 사람의 입장에서 영화 저널리즘의 한 가운데서 잡지를 만들고 평론을 해온 무게감 있는 이름을 천안의 한적한 책방에서 만날 수 있었다는 게 대단하고 기특한 일이라 여간 뿌듯한 게 아니다.

한국에서 영화저널리즘의 전성기는 영화 탄생 100주년을 앞둔 1990년대에 찾아왔다. 그 시절 한국 영화산업은 급속히 팽창했고, 그 수요에 발맞춰 ‘씨네21’이나 ‘키노’와 같은 영화전문지가 등장해 기존의 ‘스크린’이나 ‘로드쇼’와 같은 영화잡지와 더불어 대중들의 지지와 관심을 얻었다. 그 무렵 신문과 잡지에 영화평을 쓰거나 라디오나 텔레비전에 출연해 영화이야기를 들려주던 영화평론가들은 영화감독이나 배우 같은 일종의 스타로 대우받을 정도였다.

당시의 스타 영화평론가 중 한명이 한겨레신문의 연재물인 ‘영화관람석’에 영화평을 게재하던 이정하다. 지금 그의 이름이 낯설게 느껴지는 것은 그의 이름이 영화저널리즘의 한 획을 그은 ‘씨네21’과 ‘키노’가 창간되던 순간, 소위 절필 사건으로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절필 사건이란 별반 특별할 것이 없는 한국 영화평론의 역사에서 특기한 일로 기록되어 있다. ‘씨네21’ 창간 직후인 1995년, 김성수 감독의 영화 ‘런어웨이’에 대해 이정하의 날선 비평이 있었고 이에 이현승 감독의 반론이 이어졌다. 이정하는 재반론으로 응수하는 대신 절필 선언을 통해 영화평론가의 길에서 스스로 퇴장했다.

당시 ‘씨네21’ 편집장이던 조선희 작가는 “글쟁이가 글을 안 쓰고 지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기에 이정하 평론가가 언젠가 다시 영화평론의 길로 돌아올 거라 생각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정하는 글쟁이라기보단 운동가에 가까운 사람이었다. 서울영화집단에서부터 민족영화연구소, 한겨레영화제작소, 한국영화연구소 등을 만들어 영화를 통한 사회 변혁을 꿈꿨던 그에게 세상을 바꾸는 글이 아닌 대중의 호기심을 채우는 글은 불필요한 장식이었는지도 모른다.

이정하는 영화판을 떠나 한옥을 짓는 목수가 됐다. 내가 그를 처음 보았을 때 그는 전북대학교의 정문을 한옥으로 만들고 있었다. 올해 초 출간된 민족영화연구소와 한겨레영화제작소 자료집 ‘영화운동의 최전선’의 제작을 위해 그가 머물고 있는 경남 함안으로 가서 당시의 인물들과 함께 좌담회를 열기도 했다. 5월에는 책방 노마만리에서 ‘영화운동의 최전선’ 출판기념회를 열며 그를 초대했고 고맙게도 천안까지 와 주었다. 몇 번이나 만날 기회가 있었음에도 그의 절필에 대한 자세한 내막은 묻지도, 물어볼 수도 없었다.

최근 이정하의 ‘영화와 글쓰기’(부키, 1997)라는 책을 읽었다. 나는 그가 쓴 평론집이 있다고 기억하고 있었는데 그게 평론집이 아닌 평론가로서 절필을 선언한 후 쓴 글을 모은 책이란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그 책을 읽으며 그가 영화평론가라는 직함을 그렇게 갈망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맞지 않은 감투를 벗어 던진 소회 같은 것이 진하게 묻은 이 책은 영화를 통한 변혁의 길에 여전히 서 있던 영화운동가 이정하가 독자에게 보내는 마지막 인사와 같았다.

책을 읽으며 영화잡지는 사라져 거의 남아 있지 않은 지금, 현존하지만 평론가로서는 부재한 이정하라는 이름을 떠 올려 본다. 지금은 읽을 수 없는 그의 글이 궁금해진다.

▲한상언 영화연구소대표·영화학 박사·영화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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