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열단100주년]①신채호, 항일선언문의 백미 '조선혁명선언'을 쓰다
【서울=뉴시스】단재 신채호 선생. (사진=뉴시스DB)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이후인 1919년 11월10일. 만주의 한 시골 마을에 신흥무관학교 출신 젊은이 13명이 모였다. 이들은 대한의 독립을 위해 항일 무장 투쟁을 벌이기로 뜻을 모아 조선의열단을 결성했다. 뉴시스는 프랑스 레지스탕스 활동에 비견되는 의열단의 창단 100주년을 맞아 '조선의열단 100주년 기념사업 추진위원회' 도움으로 의열단의 대표적 인물들을 매주 소개한다. 독립운동사에 지울 수 없는 족적을 남겼음에도 잊혀져만 가는 선인들의 숭고한 희생과 헌신을 광복절을 앞두고 재조명해 본다.
【서울=뉴시스】김성진 기자 = 단재 신채호(丹齋 申采浩) 선생은 언론인, 역사학자, 문장가이자 아나키스트(무정부주의자) 혁명가로 항일선언문의 백미이자 독립운동사 불후의 명작으로도 일컬어지는 '의열단 선언'(조선혁명선언)을 작성했다.
당시 애국자들은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총 대신 붓을 들어 일제가 심어놓은 식민사관을 배격하고 민족사관을 정립하는 역사의 힘을 배양하는 데 집중했다.
선생은 어릴 때부터 남다른 면모를 보였다. 10세 즈음 '통감(通鑑)'과 '사서삼경'을 읽고 시문에 뛰어나 주위에서 신동이라 불렸다.
성균관에 입학해 당대 이름 높은 유학자 문하에서 공부했던 선생은 25세 때 신규식, 신백우 등과 함께 향리 부근에 산동학원(山東學院)을 설립하고 신교육운동을 전개했다.
26세가 되던 1905년 2월 성균관 박사가 됐으나 사임하고, 장지연의 초청으로 '황성신문'(皇城新聞)에서 논설기자로 크게 활약했다.
황성신문은 장지연의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과 함께 오조약청체전말(五條約請締顚末)이라는 제목으로 을사늑약 체결 과정을 보도했고, 결국 1905년 11월 통감부에 의해 무기 정간됐다.
선생은 황성신문이 무기 정간된 이듬해 양기탁의 천거로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에 주필로 초빙돼 망명할 때까지 논설을 썼다. '독사신론'(讀史新論)과 '수군 제일 위인 이순신전' 등의 사론(史論)을 연재했다.
【서울=뉴시스】박자혜(왼쪽)와 신채호의 모습.(사진=국가보훈처 제공)
1909년 안창호, 윤치호, 최광옥, 박중화, 장응진 등과 신민회의 방계조직인 청년학우회를 발기하고 취지서를 집필했다.
1910년이 되자 신민회 간부들은 일제 침략 하에 국내에서의 국권회복운동은 힘들다고 판단, 국외 독립운동기지를 구축하고 이를 근거로 장차 일제와 독립전쟁을 전개하기로 마음먹었다.
선생은 같은 해 봄 중국 칭다오(靑島)에 도착해 신민회 동지들과 함께 청도회의에 참석하고,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해 윤세복, 이동휘, 이갑 등과 광복회를 조직해 활약했다.
이후 1913년 북만주 밀산(密山)을 거쳐 상해로 가서 동제사(同濟社)에 참여·활동하는 한편 박은식, 정인보, 조소앙, 문일평 등과 박달학원(博達學院)을 세워 교포 교육에 힘썼다.
1914년에는 윤세용, 윤세복 형제의 초청을 받아 만주 봉천성(奉天省) 회인현(懷仁縣)에 가서 동창학교(東昌學校) 교사로 재직하면서 '조선사'를 집필했다.
1918년께부터는 북경 보타암(普陀庵)에 살면서 국사연구를 계속하는 한편, '북경일보'(北京日報) 등에 논설을 기고했다.
3·1운동이 일어났던 1919년에는 북경에서 대한독립청년단을 조직해 단장이 됐으며, 그해 4월 상해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해 임시의정원 의원이 됐다.
선생은 7월 전원위원회 위원장 겸 의정원 의원에 선출됐으나, 이승만의 노선에 반대해 이를 사임했다.
1922년에는 의열단의 단장(의백)이었던 김원봉의 초청을 받아 상해에 가서, 이듬해 초 마침내 '조선혁명선언'(朝鮮革命宣言)으로 불리는 의열단 선언을 집필, 발표했다.
이 선언에서 선생은 민중 직접 혁명을 주장했다.
【서울=뉴시스】단재 신채호 선생이 1923년 의열단의 독립운동이념과 방략을 이론화해 천명한 '조선혁명선언'. 2019.06.07. (사진=조선의열단기념사업회 제공) [email protected]
1924년께부터는 선생이 쓴 사론과 시론들이 동아일보, 조선일보 등에 발표됐다. 1925년에는 민족독립운동의 방편으로 대만인 임병문 등과 무정부주의동방연맹을 조직했다.
선생은 1928년 4월 무정부주의동방연맹대회에 참석해 활동하는 등 직접 행동 투쟁에 나섰다. 그러나 같은 해 5월 대만에서 외국위체 위조 사건으로 일경에 체포돼 대련(大連)으로 이송됐다.
선생은 1930년 5월 대련지방법원에서 10년형을 선고받고 여순감옥(旅順 監獄)으로 이감해 복역하던 중 뇌일혈로 순국했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군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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