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열단100주년]②창단 멤버 윤세주, 태항산 전투서 끝내 日 총탄에 스러져
【서울=뉴시스】뉴시스와 조선의열단 100주년 기념사업 추진위원회는 11일 '이주의 조선의열단' 두 번째 인물로 윤세주 지사를 선정했다. 사진은 윤세주 지사의 모습. 2019.08.09. (사진=조선의열단 100주년 기념사업 추진위원회 제공) [email protected]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이후인 1919년 11월10일. 만주의 한 시골 마을에 신흥무관학교 출신 젊은이 13명이 모였다. 이들은 대한의 독립을 위해 항일 무장 투쟁을 벌이기로 뜻을 모아 조선의열단을 결성했다. 뉴시스는 프랑스 레지스탕스 활동에 비견되는 의열단의 창단 100주년을 맞아 '조선의열단 100주년 기념사업 추진위원회' 도움으로 의열단의 대표적 인물들을 매주 소개한다. 독립운동사에 지울 수 없는 족적을 남겼음에도 잊혀져만 가는 선인들의 숭고한 희생과 헌신을 광복절을 앞두고 재조명해 본다.
【서울=뉴시스】김성진 기자 = 1901년 6월24일 경상남도 밀양에서 태어난 윤세주 지사는 세 살 위인 김원봉과 같은 마을에서 어릴 때부터 친하게 지냈다. 이들은 이후 평생 함께 독립 운동을 하는 동지가 됐다.
윤 지사는 1919년 서울에서 3·1운동에 참가한 뒤 3월13일 밀양장터의 만세 시위를 주도해 직접 독립선언서를 낭독했고, 주민들에게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나눠주면서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가행진을 했다.
윤 지사는 밀양 3·1운동을 주도한 뒤 피신했다가, 궐석재판에서 실형을 선고받고 19세라는 젊은 나이에 중국으로 망명했다.
1919년 만주의 신흥무관학교에 입학해 민족정신과 근대적인 군사교육을 체계적으로 받았으며, 김원봉과 재회해 3·1운동의 좌절을 검토하면서 실질적인 무장투쟁으로 일제에 대항해야만 독립이 가능하다고 결의해 무장투쟁을 목표로 의열단을 조직했다.
1919년 11월 중국 지린성에서 김원봉·곽재기·강세우·권준·김상윤·배동선·서상락·신철휴·이성우·이종암·한봉근·한봉인 등과 의열단을 창단했다.
같은 해 12월 김원봉·이종암·곽재기·이성우 등과 상해임시정부를 통해 폭탄과 탄피 제조기, 의약품 등을 입수했다. 이후 국내로 들어가 총독부 요인 암살, 기관 파괴를 기도하고 무기를 국내로 밀반입했다가 이듬해 6월6일 경성 인사동에서 일제 경찰들에 의해 체포됐다.
【서울=뉴시스】조선의용대 성립기념 사진. 조선 의용대는 의열단을 이끈 김원봉 등이 일제에 맞서 싸우기 위해 만든 독립운동부대다. 이후 조선의용대원 일부는 조선의용군으로, 다른 일부는 한국광복군에 합류했다. 2019.06.19. (사진=조선의열단 100주년 기념사업 추진위원회 제공) [email protected]
1932년 10월 조직적인 무장투쟁을 하기 위해 다시 중국으로 건너가 중국 국민당정부의 지원 아래 김원봉과 조선혁명간부학교를 개설하고 1기생으로 입학했다.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이를 민족해방전쟁으로 발전시켜야 한다는 생각에 애국 청년 10여 명을 이끌고 상해로 가서 중국과 한국의 민족해방운동 공동행동을 이끌어내고자 노력했다. 특히 중국편의대, 의용군본부, 각 항일신문사 등과 연계하면서 선전활동을 통해 배일 여론을 조성했다.
1940년 11월 조선의용대 내 공산주의자들이 주력인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는 화북조선청년연합회와 화북조선독립동맹을 결성하고 윤 지사는 부지회장에 뽑혔다.
1941년에는 김원봉과 헤어져 박효삼과 함께 중국 화북 지방으로 북상하게 된다. 타이항산(태항산) 항일 근거지에 도착한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는 광복군에 통합된 조선의용대와 떨어져 별도의 조선의용군을 창설한다.
【서울=뉴시스】의열단으로 활동한 약산 김원봉, 윤세주 등 밀양 출신 독립 운동가들의 활약을 되살려낸 대중가극 '약산아리랑' 공연. 2019.08.09. (사진=뉴시스DB)
6월2일 중국 항일군인 팔로군 전방총사령부가 요현 마전 일대에 이르렀을 때, 일본군 1000여 명이 비행기 2대까지 동원해 포위 공격했다. 당시 상대할 전투부대는 조선의용군 1개 지대와 약간의 경위(경호)부대 밖에 없었다. 팔로군 총사령부는 혈로(血路)를 개척해 달라는 임무를 조선의용군에 부여했다.
팔로군은 퇴각로를 확보하고 부대와 화북조선청년연합회의 비전투 요원, 가족들은 서로 부축하면서 퇴각했다. 윤 지사는 혈로를 개척하기 위해 일본군과 전투 중 다리에 총을 맞아 결국 전사한다. 윤 지사의 시신은 중국 항일군 지도자들의 묘소 옆에 안장됐다.
윤 지사는 동지들에게 "단결해서 적을 사살하기 바란다"는 유언을 남겼다. 당시 나이는 41세였다. 윤 지사 1주기인 1943년 6월 임시정부와 조선의용군 등은 합동으로 중경에서 추도회를 가졌다.
정부는 윤 지사의 공훈을 기려 198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email protected]
Copyright © NEWSIS.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