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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연배의 이야기와 함께하는 와인 65]고려 문인들의 즉석 와인파티

등록 2023.06.10 06:00:00수정 2023.06.12 09:2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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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W 메리어트 동대문 ‘와인 앤 버스커’, 뉴시스DB. *재판매 및 DB 금지

JW 메리어트 동대문 ‘와인 앤 버스커’, 뉴시스DB.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뉴시스]  제26대 충선왕 이후 제33대 창왕까지 고려의 왕은 한몽 혼혈이었다. 충선왕은 몽골어와 몽골 문화에 익숙했다. 1298년 즉위 후 폐위되기 전까지 6개월과 1308년 복위 후 3개월을 합해  총 재위기간 중 9개월 정도만 고려에 거주했다. 어릴 때는 아버지 충렬왕과 함께 고려에  살면서 어머니를 따라 원나라를 왔다 갔다 했으나, 16세 이후에는 거의 원나라에서 눌러 살다 원나라에서 죽었다. 죽은 후 유해는 고려에 묻혔다. 외가인  몽골 황실 가까이에 있는 것이 정치적으로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로 이 때문에 후에 몽골의 정치 상황이 변하자 멀리 티벳으로 유배를 간다.

충선왕은 재위 5년만인 1313년 충숙왕에게 왕위를 양위 했다. 대위왕(大尉王)이라는 원나라 작위를 받고 잠시 귀국했으나 얼마 후 대도로 돌아가 다시는 고려에 돌아오지 않았다(‘원사’). 1314년에는 원나라 우승상 자리를 사양하고 대도에 만권당(萬卷堂)이라는 독서당을 설립했다(‘고려사’). 그리고 후에 ‘역옹패설’을 지은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1288~1367)을 고려에서 불러들였다. 서예와 시문학에 조예가 깊었던 충선왕은 만권당을 통해 원나라의 사대가(四大家)중 한 사람인 조맹부(趙孟頫)를 비롯 원명선(元明善), 장양호(張養浩) 등 당대의 뛰어난 문인들과 교류했다.

특히 조맹부는 부춘산거도(富春山居圖),  촉산도가(蜀山圖歌), 양양가(襄陽歌), 주덕송(酒德頌) 등 와인을 직접 언급한 서화 작품을 남겼다. 이들이 예술을 교류하면서 와인을 마셨는지 명시적인 기록은 없다.

하지만  와인을 마셨을 것이다. 이제현은 중국에서 이백과 두보에 버금간다는 찬사를 받았고 최치원, 이규보와 더불어 조선의 3대 시인으로 불렸다. 그는 1321년 충선왕이 티베트로 유배되자  원나라 조정에 사면 상소를 올려 본토인 감숙성 지역 (지금의 청해성 장족 자치주 일대)으로 유배지가 바뀌게 했고, 1323년에는 직접 그 곳으로 찾아간다. 감숙성 지역은 그 당시 원나라의 주요 와인 산지였다.  충선왕은 1325년 유배가 풀려 대도로 돌아왔다.

통일신라와 마찬가지로 고려도 중국에 유학생을 보내고 중국의 과거에 응시하게 하여 선진 문물을 흡수했다. 김행성(金行成)은 송나라 국자감에 입학한 최초의 외국인이자 과거 급제자였다. 송나라때는 과거 응시를 위해 국자감 유학이 필수였으나 원나라와 명나라 때에는 국자감 유학 없이도 바로 과거에 응시할 수 있었다. 국자감 유학으로부터 과거에 합격하기까지는 보통1년~6년이 걸렸다. 원나라 때는 고려에서 과거에 급제한 후 일정 기간 관직을 역임한 우수한 인재 중에서 엄선하여 원나라 과거에 내보냈다.

응시자의 절반 정도가 고려의 예부시(禮部試)에서 장원을 차지한 수재였다. 급제한 후에는 바로 고려에 돌아오거나 원나라 관직에 일정 기간 복무 후 고려 조정으로 돌아와 큰 활약을 했다. 1320년 최해(崔瀣,1287~1340)는 고려 최초로 원나라 관직을 받았다. 명나라 시대에는 1371년 김도(金濤, ?~1379), 박실(朴實), 류백유(柳伯濡)가 응시하여 김도만 합격했다. 김도도 명나라 최초의 외국인 급제자 였다. 이후에는 중국 과거에 대한 응시가 단절된다. 성리학을 고려에 최초로 소개한 안향(安珦, 1243~1306)과 이제현은 충렬왕과 충선왕을 원나라에서 수행하는 과정에서 유학을 겸한 것으로 다소 배경이 다르다. 

원나라 과거에 합격하여 고려로 돌아와 큰 활약을 한 인물 중에는 근재(謹齋) 안축(安軸,1282~1348)과 목은(牧隱) 이색(李穡, 1328~1396)이 있다. 이들은 와인과도 관련이 깊다. 두사람은 와인을 마신 경험을 시로 표현하여 개인 문집에다 우리나라 최초로 기록으로 남겼다. 안축은 1323년(충숙왕 10년) 원나라 제과(制科)에 급제하여 요양로개주판관( 遼陽路 蓋州判官)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고 귀국했다.

고려사에는 안축이 1320년 10월에도 최해와 함께 원나라 과거에 응시했다는 기록이 있어 안축은 재수 후에 합격한 것으로 보인다. 여러 관직을 거쳐 관동별곡, 죽계별곡, 근재집을 남겼다.

근재집 제1권의  “화주에 있는 은자가 포도주를 가지고 와서 나에게 권하다 (葡萄酒和州隱者持以勸余)” 는 시에서, “헛되이 포도주 마시며 시골에서 늙어가네(虛食凉州老一村)” 라고 한탄했다.  여기서 ‘양주(凉州)’는 후한 말  맹타(孟佗)가 와인을 뇌물로 바쳐 양주자사 자리를 샀다는 ‘일곡양주(一斛 凉州)’의 고사성어에서 유래한 말로 와인을 뜻한다. 화주는 함경도 영흥 지역으로 중국과 가까워  와인이 민간에도 유통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안축은 화주 지역이 부임지였던 적이 있어 다른 여러 시에서도 화주를 언급했다. 

포은 정몽주, 야은 길재와 더불어 고려삼은(高麗三隱) 불리는 이색은 이제현의 제자이다. 1348년 원나라에 입국하여 국자감에서 3년을 유학하다 부친상으로 귀국하였다. 다시 원나라로 가 1354년 제과의 회시(會試)에 장원, 황제 앞에서 보는 전시(殿試)에 2등으로 급제하여 동지제고(同知制誥)의 관직을 제수 받았다. 1355년에는 고려의 벼슬도 함께 받아 두 나라에서 동시에 임명된 특이한 경력을 가졌다. 1356년 귀국하여 성균관 대사성 등 여러 관직을 지내고 성리학의 확산에 힘썼다. 이색의 문집 목은시고(牧隱詩藁) 권11에도 와인 이야기가 나온다.

“길에서 한평재를 만나 화원에서 꽃을 감상하던 중…(塗遇韓平齋賞花花園…)”이라는 시에서 “친구들을 앞뒤로 같이 만나…포도주 실컷 마시니(同盟幸先後…痛飮葡萄酒)”라 했다. 이색이 길에서 한평재와 권정당이라는 친구를 우연히 만나 창고지기가 베푼 즉석 와인파티에서 어울린 것을 쓴 글이다. 원나라 시절 고려의 상류사회에 이미 와인이 어느 정도 퍼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안축과 이색은 모두 와인의 전성기 시절 원나라에 체류했던 공통점도 있다.

▲와인 칼럼니스트·경영학 박사·딜리버리N 대표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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