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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응급실 찾아 삼만리" 환자의 절규…이젠 대화해야

등록 2024.02.28 19:0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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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응급실 찾아 삼만리" 환자의 절규…이젠 대화해야


[서울=뉴시스]박선정 기자 = "아내가 불암산에 등산을 갔다가 추락하는 바람에 허리를 다쳤는데 응급실 찾는 데만 2시간 반이 걸렸다."

지난 26일 서울의료원 응급의료센터에서 만난 50대 남성 이모씨는 보호자 대기실에서 발을 동동 굴렀다. 사고 장소와 가까운 병원으로 아내를 빨리 옮기려 했지만, 받아주는 병원을 찾느라 시간이 많이 지체됐다고 한다.

이씨는 "구급차에서 들어보니 가까운 대학병원 응급실에 의료진이 딱 한 명뿐이라 환자를 받을 수가 없다고 한다. 말이 되느냐"며 울분을 토했다.

의과대학(의대) 정원 확대에 반발해 집단행동을 불사하는 의사들과 정책을 밀어붙이려는 정부의 벼랑 끝 대치가 이어지고 있다. 어느 한쪽도 물러서지 않는 치킨게임 속에 시민들은 '당분간 절대 아파선 안 된다'며 두려움에 떠는 형국이다.

28일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전날(27일) 오후 7시 기준 빅5 병원을 비롯한 전국 99개 주요 수련병원 소속 전공의 중 약 80.8%에 해당하는 9937명이 집단 사직서를 제출한 것으로 집계됐다.

일부 중형, 중소 병원에서도 파업에 참여하는 의사들이 생겨나고 있으며, 3월부터 시작되는 수련을 포기하는 인턴들도 늘고 있다. 병원들은 이에 외래 진료와 수술 등을 미루고 응급 환자는 되도록 받지 않으면서 수용 환자를 줄이고 있다.

서울의료원을 비롯한 공공병원과 중형병원들이 비상근무 체제에 들어가 24시간 병실을 가동하고 있지만 밀려드는 환자를 충분히 수용하기에는 역부족이다.

특히 응급실은 이미 한계가 턱밑까지 차올랐다고 의사들은 입을 모은다. 세브란스병원에서 만난 한 의료계 관계자는 "다음 주쯤 되면 큰 고비가 올 거 같다"고 우려했다.

이미 지방에서는 '응급실 뺑뺑이' 끝에 환자가 숨지는 안타까운 사례가 나왔다. 지난 23일 대전에서 한 80대 심정지 환자가 병원 7곳에서 받아줄 수 없는 통보를 받았다가 53분 만에 도착한 대학병원에서 사망했다. '아프거나 다치면 이젠 큰일난다'는 공포가 시민들 사이에 빠르게 퍼지고 있는 이유다.

의사가 없어 붕괴 위기에 처한 지역의료, 필수의료, 응급의료 상황을 개선해야 한다는 목소리는 꾸준히 나왔다. 의대 증원은 새삼스러운 해법이 아니다. 필수 의료 기피 현상으로 인한 인력난과 낮은 의료 수가 문제 등 지적받아 온 의료 시스템의 왜곡을 바로잡자는 취지다.

의료계는 정부 정책의 당사자로서 의견을 낼 권리가 있고, 정부는 이 과정에서 이해관계자를 설득할 의무가 있다.

하지만 파업 9일째에 접어드는 지금까지도 정부는 의료 현장을 떠난 전공의들에게 업무개시명령을 내리며 물러설 수 없다는 강경 대응 방침을 강조할 뿐 건설적인 논의는 시작하지 못하고 있다. 대신 정부는 "국민을 볼모로 삼은 의사들" "집단행동 주동자 엄벌"과 같은 단어들로 국민에게 의사들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심어줬다.

의사들도 마찬가지다. 박민수 복지부 2차관이 브리핑 중 발음 실수를 한 것을 두고 "차관이 의사를 '의새'(의사 지칭 비속어)로 불렀다"고 역정을 내며 의미 없는 입씨름을 이어가고 있다. 의료의 대상인 '환자'는 사라진 주객이 전도된 싸움인 셈이다.

이런 가운데 서울대 의대에선 이례적인 축사가 나왔다. 김정은 서울대 의대 학장은 "사회적으로 의사가 숭고한 직업으로 인정받으려면 경제적 수준이 높은 직업이 아니라 사회적 책무를 수행하는 직업이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명의나 훌륭한 의사도 중요하지만 세상을 치료하는 의사, 받은 혜택을 사회에 돌려줘야 한다는 뚜렷한 책임감을 가진 의사, 사회적 책무성을 위해 희생하는 의사가 될 때 국민들의 신뢰 속에서 우리나라의 미래 의료·의학계를 이끌어갈 수 있다"고 했다.

의사들로선 어느 때보다 강경한 정부의 의대 증원 드라이브에 분개할 수도, 코로나19 때 헌신이 무색하게 차가워진 국민의 시선에 서운할 수도 있다. 하지만 환자를 위해 사회적 책무를 다해야 한다는 의료계 선배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정부도 주동자 구속 수사, 면허 취소 등 전방위 압박으로 일관하기에 앞서 대화의 공간을 열어줘야 한다. 양보 없이 서로 주장을 관철하려고만 한다면 피해는 오롯이 환자의 몫으로 돌아간다. 이미 많이 늦었다. 이제는 협상 테이블에 앉아야만 한다.


◎공감언론 뉴시스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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