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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역에 납세 면제까지…DMZ 특별구역 '대성동 마을'

등록 2011.07.23 06:00:00수정 2016.12.27 22:3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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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뉴시스】사진공동취재단 = 16일 경기도 파주시 대성동초등학교 졸업식에서 한복을 입은 졸업생들이 내빈들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이현정 기자 = 국민의 4대 의무 가운데 병역과 납세의 의무가 면제되는 곳. 북한의 선전마을 기정동 마을과 불과 2.4㎞떨어져 있고 1년 6개월 이상 거주하지 않거나 결혼을 해 분가하면 다른 곳으로 이주해야 하는 마을.

 최북단 남측 비무장지대(DMZ)에 존재하는 유일한 마을, 대성동 얘기다.

 인근 통일촌과 해마루촌은 간단한 출입절차를 거쳐 누구나 방문할 수 있지만 대성동 마을은 언론도 1년에 3~4차례만 방문이 허용될 정도로 출입이 까다롭다.

 DMZ 안에 있는데다 불과 200여m 거리에 북한군 초소가 있어 분단의 경계선과 가장 가깝게 맞닿은 곳이기 때문이다.

 지난 4월 이 지역 주민들이 영농철을 앞두고 농로 포장과 농수로 정비를 위해 인부 15명의 출입승인을 군사정전위에 요청했다. 하지만 20여일이 지나서야 승인이 떨어졌다. 주민들은 농사에 차질을 빚게 됐다며 국가인권위에 진정서를 제출하기도 했다. 

 이 지역 주민들은 대부분 벼농사를 짓는다. 북한과 가까운 지역에 농사를 지으러 나갈 때는 군인들이 경호를 위해 동행한다. 이 때문에 논밭에 나갈 때도 미리 군 부대에 보고해야 한다.

 1997년에는 마을 주민 2명이 도토리를 줍다가 북한군에 납치돼 닷새 만에 풀려난 적도 있었다. 분단선이 철책으로 명확히 표시된 게 아니어서 주민들도 늘 마음을 졸이며 영농활동을 한다.

 대성동 마을은 '남북 비무장지대에 각각 1곳씩 마을을 둔다'는 정전협정 규정에 따라 북한의 기정동 마을과 함께 1953년 8월3일에 조성됐다.

 당시에는 인근에 거주했던 30가구의 주민들이 마을을 구성했지만 지금은 50가구 200여명이 산다. 시집온 며느리는 주민이 될 수 있지만 시집간 딸은 주민이 될 수 없다. 반 세기가 흘렀는데도 인구에는 큰 변동이 없는 이유다.

 경작면적은 전체 2.44㎢, 농가당 9.29㏊에 달하고 농사 소득도 7000만~8000만원으로 높은 편이지만 경작지를 소유할 수는 없다. 수십 년 농사를 지어도 땅 소유권을 주장할 수 없으니 주민들의 고충은 이만저만이 아니다.

 행여 천안함·연평도 사건 같은 남북 간 군사 대치 상황이라도 벌어지면 출입통제는 더욱 강화되고 마을에는 극도의 긴장감이 흐른다.  

 대성동 마을에서 손에 잡힐 듯 보이는 북한의 기정동 마을에는 158m의 인공기 게양대가 있다. 남북은 두 마을에 게양대를 설치한 뒤 경쟁이라도 하듯 게양대 높이를 점점 높여왔다.

 대성동 마을의 국기게양대도 99.8m로 국내에서 가장 높지만, 기정동 마을의 인공기 게양대는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높이를 자랑한다. 이 게양대에 달린 인공기는 가로 30m, 세로 15m다.

 대성동 마을 국기게양대의 태극기는 가로 18m, 세로 12m로 성인남성 2명이 들어가 누울 수 있는 크기다. 워낙 큰데다 바람으로 마모가 심해 2~3달에 한 번씩 갈아줘야 한다. 한 번 갈아주는데 200만원이 든다고 한다.

 이 마을의 유일한 학교인 대성동 초등학교는 학생 30명에 교사 25명으로 1대 1 과외가 가능한 선진형 학교다. 졸업생들은 경기도 내 국립학교 중 어디든 원하는 곳을 택해 갈 수 있기 때문에 파주시 학부모들의 선망의 대상이 됐다.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 소속 미군들은 주 2~3회 이 학교를 방문해 직접 학생들에게 영어 과외도 해주고 있다.

 졸업생은 1년에 2~6명 배출되며, 지자체나 기관 등에서 졸업식 때마다 선물을 보내 졸업생이 수레로 선물을 옮겨야 한다는 우스갯소리도 나온다.

 대성동 초등학교가 처음부터 '명문'이었던 것은 아니다. 한 때 전교생이 10명을 넘지 못하면서 폐교 위기를 겪다 정부 지원으로 발돋움했다.

 하지만 북쪽으로 창문이 막혀 있고, 운동회나 졸업식 때마다 항상 JSA 군인들이 경비를 서는 등 학생들은 분단의 상처와 늘 함께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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