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부녀, 여성 대통령서 수감자로…20년 정치인생도 마감
【서울=뉴시스】고승민 기자 = 뇌물수수 등 혐의로 구속영장이 발부된 박근혜 전 대통령이 31일 오전 서울구치소에 수감되기 위해 검찰차량을 타고 서초동 서울중앙지검을 나서고 있다. 강부영 서울중앙지법 영장 전담 판사는 증거 인멸 등의 우려가 있다는 검찰 측 주장을 받아들여 구속영장을 발부했다. 2017.03.31. [email protected]
박 전 대통령은 5·16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부친인 박정희 전 대통령이 1963년 2월 제5대 대통령으로 취임하자 영애(令愛)로 18년간을 청와대에서 지냈다. 1974년 광복절 경축행사장에서 모친 육영수 여사가 문세광에 의해 암살당하면서 22세의 나이에 퍼스트레이디 대행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1979년 10월26일 박정희 전 대통령마저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쏜 총에 맞아 서거하면서 박 전 대통령은 청와대를 나와 18년간 은둔생활을 했다.
이후 박 전 대통령은 1997년 우리나라가 IMF(국제통화기금) 사태를 맞으면서 정치와 인연을 맺었다. 그해 12월 대선을 8일 앞두고 이회창 한나라당 대선 후보 지지 선언을 하고 선거운동에 뛰어들며 20년 정치인생을 시작했다.
박 전 대통령은 1998년 4월 대구 달성 국회의원 보궐선거를 통해 초선의원으로 국회에 입성한 이후 정치인으로 입지를 다져갔다. 그러던 중 2004년 한나라당이 차떼기 사건 수사와 노무현 대통령의 탄핵 역풍까지 겹치며 최악의 위기 상황에 빠지자 역설적으로 박 전 대통령에게 기회가 왔다.
그해 4월 총선을 앞두고 치러진 전당대회에서 박 전 대통령은 당 대표로 뽑혀 구원투수로 등판했다. 천막당사 설치, 천안 연수원 매각 등 승부수를 띄운 끝에 121석을 얻어 개헌 저지선을 확보했고 그 공을 인정 받아 박 전 대통령은 단숨에 유력 대선주자 반열에 올랐다.
이후 대표 재임 2년3개월 동안 지방선거와 각종 재·보궐선거에서 열린우리당을 상대로 '40대 0'의 완승을 거두며 '선거의 여왕'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러나 2007년 당내 대선후보 경선에서는 이명박 후보와 경쟁했다가 패해 비주류로 밀렸다. 다만 경선방식 등의 논란에도 불구하고 깨끗이 승복함으로써 차기 대권주자로서 입지를 확실히 다지는 계기도 됐다.
박 전 대통령은 2011년 말 한나라당이 서울시장 보선 패배, 디도스 공격 파문으로 위기에 빠지자 비상대책위원장으로 다시 당의 전면에 등장, 당명을 새누리당으로 바꾸며 개혁에 착수했고 2012년 4월 총선에서 과반의석 확보에 성공했다. 이를 바탕으로 같은 해 12월 대선에서 18대 대통령 당선까지 이뤄넀다.
청와대를 떠난지 34년 만에 대통령의 딸에서 대통령의 자격으로 청와대에 입성하게 된 동시에 한국 최초의 여성 대통령 탄생이자 최초의 부녀 대통령이란 타이틀까지 얻은 것이다.
그러나 박 전 대통령의 영광은 여기까지였다. 박 전 대통령은 40년 지기인 최순실의 국정농단 사태가 만천하에 드러나면서 임기 4년차인 지난해 12월9일 국회의 탄핵소추로 직무정지 상태에 놓인다.
이후 박 전 대통령은 관저에 칩거하며 헌법재판소의 탄핵심판에 대비했지만 지난 10일 헌재에서 만장일치로 인용 결정이 내려짐에 따라 헌정사상 처음으로 파면된 대통령이란 오명을 안았다.
박 전 대통령은 지난 12일 서울 강남구 삼성동 자택으로 돌아가면서 "시간이 걸리겠지만 진실은 반드시 밝혀진다고 믿고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지난 21일 검찰의 소환조사와 30일 법원의 영장실질심사에 출석해 자신의 결백과 구속수사의 부당함 등을 주장했다.
하지만 법원이 끝내 구속영장을 발부함에 따라 박 전 대통령은 영어의 몸이 됐다.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에 이어 구속된 3번째 전직 대통령이란 오명도 쓰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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