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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아직도 잠 못 이루는 남자배구 선수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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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2020-01-20 10:3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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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 권혁진 기자 = 2020 도쿄올림픽 남자 배구 아시아 대륙예선 탈락의 여운은 지금도 V-리그 코트를 감돌고 있다. 최근 만난 관계자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정말 너무 아쉽다"는 말을 되풀이했다.

아시아 최강 이란과의 준결승전을 지켜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같은 기분일 것이다. 잘 싸우고도 2점이 모자라 결승 진출에 실패했으니 충분히 이해가 된다. 이란과 마지막 관문에서 만난 중국이 허망하게 무너지는 모습은 '우리가 이란 대신 나갔더라면'이라는 생각과 맞물려 관계자들과 팬들 속을 더욱 쓰리게 했다.

당사자인 선수들 마음은 오죽할까. 18일 대한항공과의 V-리그가 끝난 뒤 만난 대표팀 주장 신영석(현대캐피탈)은 "20여 년 배구하면서 이 정도로 열심히 했던 것은 처음이었다"면서 "아쉽기도 하고 홀가분하기도 한데 어떤 느낌인지 모르겠다. 꿈인 것 같다. 잠도 잘 못 잔다. 앞으로 2주 정도는 그럴 것 같다"고 고개를 숙였다.

마지막 올림픽을 준비했던 한선수(대한항공)도 마찬가지. 후배들에게 '24년의 올림픽 진출권 획득'이라는 무거운 짐을 넘겨주게 된 그 역시 잠을 제대로 청하지 못할 정도로 현실 복귀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2000년 시드니 대회는 한국 남자 배구가 나선 가장 최근의 올림픽으로 남아있다. 2004년 아테네 대회부터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 대회까지 4차례나 도전장을 던졌지만 모두 실패했다.

크고 작은 홍역을 치른 2019년을 돌이켜보면 어쩌면 남자 배구의 도쿄행 무산은 이미 예고된 일인지도 모른다.

대표적인 사례가 지난해 4월 최초의 남자대표팀 전임 지도자였던 김호철 전 감독의 프로행 추진이다. 올림픽을 목전에 두고 팀을 떠나려 했던 김 감독과 위약금(이직 전까지 받은 급여의 50%)을 물면 이직이 가능하다는 내용의 허술한 계약서를 만들고 각종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말장난'을 반복한 대한배구협회는 엄청난 비난에 시달렸다.

김 감독에게 법적인 책임을 묻기 어렵고, 그가 남았더라도 올림픽에 갔을 것이라는 보장은 없지만 어쨌든 해당 사태가 팀에 악영향을 끼친 것은 자명하다. 김 감독과 대한배구협회의 진흙탕 싸움은 배구인들의 입을 통해 선수들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스테파노 라바리니 감독 체제 아래 '한 번 해보자'며 똘똘 뭉친 여자 대표팀을 보면서 남자 선수들은 과연 어떤 기분이 들었을까.

직접 코트를 누비는 선수들이 국제 경쟁력 약화에서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사명감 넘치는 선수들에게는 미안한 이야기이지만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일부 선수들에게 국가대표팀은 영예가 아닌 기피의 대상이었다. 병역 혜택이 걸린 아시안게임과 다른 국제대회를 대하는 선수들의 온도차는 분명히 존재했다.

남자 배구는 또 한 번 4년짜리 장기 프로젝트와 마주했다. 엘리트 유소년 선수의 수가 점점 하락하는 추세에 더 이상 같은 과오를 반복해서는 안 된다. 선수들이 태극마크에 자긍심을 느낄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해주고, 국내 리그 여건상 라이트 공격수가 클 수 없다면 제도의 변경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 4년 뒤에도 "아쉬움에 잠을 못 잔다"는 마음 아픈 말을 듣고 싶지 않다면 곪아가는 상처들을 외면해선 안 된다.


◎공감언론 뉴시스 hjkwon@news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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