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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형식·공간이 잘 맞물린 이머시브…'어쩔 수 없는 막, 다른 길에서'

등록 2021.03.26 13:2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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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태일 열사의 50주기 기획 연극

[서울=뉴시스] 연극 '어쩔 수 없는 막, 다른 길에서'. 2021.03.26. (사진 = 아름다운청년 전태일기념관 제공) 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 연극 '어쩔 수 없는 막, 다른 길에서'. 2021.03.26. (사진 = 아름다운청년 전태일기념관 제공) [email protected]

[서울=뉴시스]이재훈 기자 = 내용적으로도, 형식적으로도, 여기에 공간적으로도 메시지가 잘 맞물리는 연극은 드물다. 더구나 실존인물을 다룰 경우엔 더더욱 드물다. 

지난 19~25일 아름다운청년 전태일기념관에서 초연한 연극 '어쩔 수 없는 막, 다른 길에서'는 이 드문 사례를 극복한 전범으로 기억될 만하다.

작년 노동운동가 전태일(1948~1970) 열사의 50주기를 맞아 기획된 이 작품은 평소 그에 대해 잘 알려지지 않은 소재에서 시작해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전태일은 '근로기준법 준수'를 외치면서 자신의 몸을 불사른, 강렬함으로 기억된다. 동시에 매일 글을 쓰며 소설가를 꿈꾼 '문학청년'이기도 했다. 소설 세 편의 시놉시스(초안) 세 편도 남겼다. '어쩔 수 없는 막다른 길에서' '가시밭길' '기성세대의 경제관념에 반항하는 청년의 몸부림'이다.

연극은 여행사 '피스 투어'에 인턴으로 입사한 '은우'의 회사 생활 그리고 그녀가 '어쩔 수 없는 막다른 길에서' 초안을 발전시켜 소설을 완성시키려고 하는 과정을 함께 그린다. 연극 제목 '어쩔 수 없는 막, 다른 길에서'는 '어쩔 수 없는 막다른 길에서'를 변형시킨 것이다.

연극의 구조는 탄탄하다. 특히 대조법을 탁월하게 사용했다. 회사에서 노조 가입과 맞물려 곤욕을 치르고 고민하는 은우의 상황과 1970년대 직접 노동법을 공부하며 열악한 노동환경에 맞섰던 전태일의 이야기를 병행하며 '노동'에 대한 문제를 환기시킨다.

또 피스 투어 내에 두 개의 노조도 대조시킨다. 사측으로부터 외면 받는 여행 가이드에게 물을 건넸다는 이유로 사측으로부터 손해배상 소송 청구를 당한 나 대리가 속한 '평화노동조합', 사측이 만든 노동조합인 '피스 유니온'을 대비시킨다. 은우는 정당한 노력으로 피스투어 인턴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회사 경영 팀장인 형부의 존재는 그녀를 혼란스럽게 만든다.

딱딱한 이야기 또는 멀게 느껴질 수 있는 내용이지만, 연극은 효과적인 이머시브(immersive·관객참여형)는 구성으로 몰입도를 극대화한다. 

[서울=뉴시스] 연극 '어쩔 수 없는 막, 다른 길에서'. 2021.03.26. (사진 = 아름다운청년 전태일기념관 제공) 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 연극 '어쩔 수 없는 막, 다른 길에서'. 2021.03.26. (사진 = 아름다운청년 전태일기념관 제공) [email protected]

회차당 20명가량의 관객들은 '피스 투어' 인턴이다. 사원증을 각자 목에 걸고, 인턴 연수의 막바지에 함께 하게 된다. "난 행복을 꿈 꿔요"라며 사가를 함께 부르고, 손쉽게 (엉망으로) 여행 가이드를 만드는 방법을 배운다.

2층으로 올라가면, 현재의 피스투어와 과거의 평화시장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번갈아서 진행된다. 현재의 나 대리에 대한 회사의 압박은 더 심해지고 은우의 고민도 커진다. 과거의 전태일은 후배들인 '시다'가 해야 할 청소까지 도맡는 동시에 사측으로부터 노동 환경 개선을 끊임없이 이야기한다.   

3층으로 올라가면, 관객들 아니 인턴들은 '평화노동조합'에 가입해야 할지, '피스 유니온'에 가입해야 할지에 대해 투표도 한다. 이후 전태일이 분신항거를 결정하는 순간의 긴장감이 엄습한다. 현재 피스투어 해외 가이드가 열악한 환경에서 1인 시위를 할 때, 나 대리가 그에게 물을 건넸던 장면도 마주한다.

공연장이자 이번 작품을 자체 제작한 아름다운청년 전태일기념관에 곳곳에 걸린 전태일의 흔적 그리고 우리 현대사의 아픔들도 자연스레 스쳐지나간다. 

이런 과정을 겪고 나면, 놀랍게도 노동 문제는 우리에게 '예외적인 사건'이 아닌 '일상의 사건'이 된다. 이런 체험은 이머시브 공연의 진정한 매력이자, 이 형식이 주는 힘이다.

극작은 이양구 작가와 김태형 연출가의 시너지 덕이다. 두 창작진은 그간 공연계에서 서로 다른 영역에서 존재감을 부각시켜왔으나 접점은 없었다. 2008년 신예 작가들을 위한 프로젝트 '봄 작가, 겨울 무대'에 각자 다른 작품의 작가, 연출로 참여한 인연 정도가 다다.

연출 활동도 겸하는 이 작가는 정통 연극 안에서 꾸준히 소외된 자들의 목소리를 대변해왔다. 반면 김 연출은 자신만의 실험·개성이 뚜렷하나 주로 상업적인 연극·뮤지컬 테두리 안에서였다. 대극장 뮤지컬 연출도 맡았다.

[서울=뉴시스] 연극 '어쩔 수 없는 막, 다른 길에서'. 2021.03.26. (사진 = 아름다운청년 전태일기념관 제공) 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 연극 '어쩔 수 없는 막, 다른 길에서'. 2021.03.26. (사진 = 아름다운청년 전태일기념관 제공) [email protected]

하지만 이 작가와 김민솔 제작 PD는 김 연출이 제격이라고 생각했다. 대학로의 대표적인 관객참여형 공연 '내일 공연인데 어떡하지' 등 이머시브 공연에 특화됐기 때문이다.

결국 이 작가의 치밀한 사전 조사를 바탕으로 한 탄탄한 대본 구성, 김 연출의 동선 이동·공간 활용 아이디어 등이 맞물렸다. 이를 통해 이머시브 공연계에도 형식·내용·공간의 정서와 메시지가 맞물리는 '웰메이드 작품'이 탄생했다. 관객이 계속 움직여야 하지만, 모두 페이스 실드를 착용하고 이동 때마다 거리두기를 지키는 등 코로나19 방역 지침도 꼼꼼히 지켰다. 

1년여간 공연을 준비해온 김 PD는 제일 힘들었던 점으로 역시 코로나19를 꼽았다. "전태일 50주기인 작년 11월 공연 예정이었는데 확산세로 밀렸고, 이머시브 공연이라 방역 지침과 관련 고려해야할 상황도 많았다"고 했다.

하지만 공연이 성료한 만큼 보람도 크다. 김 피디는 "노동 이슈라고 하면 보통 우리의 이야기가 아니라고 생각하시는데, 관객분들이 노동이라는 것이 우리 주변에 존재하며 우리가 하는 것도 노동이라고 생각하게 됐다고 말씀 주셨을 때 감사했다"고 덧붙였다.

이 작품의 백미는 마지막 장면이다. 전태일이 일했던 평화시장이 한눈에 보이는 아름다운청년 전태일기념관 옥상에서 펼쳐진다. 전태일의 분신 장면은 그가 탐독하던 노동법 책을 불태우는 것으로 대신하고, 관객들이 거기에 물을 나눠 부으면서 아픔을 함께 위로해준다.

그리고 시대와 공간을 너머서 은우는 태일에게 소리친다. 이렇게 건물이 높게 올라간 변화한 풍경을 보라고. 하지만 여전히 열악한 노동 환경이 공존한 현실에 그 외침은 묘한 흔들림과 울림을 동반한다.

과거의 전태일이자 지금의 김다인 대리를 연기한 김다흰 배우의 노래가 귓가를 계속 감돈다. "난 행복을 꿈꿔요. 진짜 행복을 원해." 김다흰을 비롯 소정화, 이정수, 이호영, 정원조, 한세라 등 출연 배우들은 모두 호연했다.


◎공감언론 뉴시스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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