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모적 교육이념 경연장 된 자사고 폐지 논란…"학생들 피해"
보수 수월성 대표격 '자사고' vs 진보 평등성 위주 '혁신학교'
"정권마다 정치색 짙은 교육정책…적폐 청산 하듯이 접근해"
자사고 폐지 대입제도·고교서열화 해법 아니다 지적도 나와
"교육정책은 일관성 중요…국가교육위 서둘러 출범 시켜야"
【전주=뉴시스】 김얼 기자= 상산고등학교의 자립형사립고 재지정 평가 결과 발표날인 20일 전북 전주시 전라북도교육청 입구에 문재인 대통령에게 전하는 글귀를 적은 현수막이 걸려 있다. [email protected]
취소 결정이 내려졌거나 평가 결과를 기다리고 있는 자사고들 뿐 아니라, 학생과 학부모, 교사단체, 심지어 정치권까지 나서 해묵은 교육이념 논쟁에 가세하고 있다.
한국사 국정교과서 사태와 무상급식에 이어 최근 고교무상교육까지 굵직한 교육정책을 다룰 때마다 거듭됐던 보수와 진보 간 소모적인 이념 논쟁이 또 다시 격화되는 것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적지 않다.
이 같은 악순환의 고리를 끊기 위해선 교육문제를 더 이상 정파적 입장에서 다뤄서는 안된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그동안 교육계 내에선 문재인 정부의 자사고 폐지 배경에는 진보진영이 내세운 대안적 교육브랜드인 '혁신학교'를 강화하기 위한 목적이 깔려 있다는 얘기가 공공연하게 나왔다. 이명박 정부에서 주창하고 박근혜 정부에서 존치 결정을 내렸던 자사고 제도를 적폐청산 차원에서 폐지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서울지역 한 사립대 교육학과 교수는 21일 "정권마다 정치색 짙은 교육정책을 국정과제로 내세우다보니 교육정책이 일관성을 이루지 못하는 측면이 있다"면서 "(자사고 폐지와 혁신학교 등은) 단기적으로 적폐청산 하듯 접근하기 보다는 국가교육위원회나 정책숙의를 통해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내야 할 중·장기적 과제"라고 지적했다.
사실 자사고 폐지 문제의 핵심에는 수월성과 평등성을 바탕으로 한 논쟁이 존재한다. 자사고 존치론자들은 학생들의 학교 선택권과 학습 효율성을 강조하지만, 폐지론자들은 자사고가 고교서열화를 조장하고 교육비 부담을 가중시킨다고 비판한다.
이 같은 수월성·평등성 논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지난 1979년이다. 그해 시험이 아닌 추첨을 통해 학교를 배정하는 고교평준화 정책이 시행됐다. 고교평준화는 고교입시를 위한 과열경쟁을 해소한다는 차원에서 추진됐지만 고교교육의 하향 평준화의 주범이라는 논란이 거셌다. 결국 고교평준화에 대한 불신은 김대중 정부가 특수목적고(특목고)를 확대하게 만들었고, 이명박 정부에 와서는 자사고 지정제도로 이어졌다.
보수진영에서는 학습효과를 최대한 끌어올리는 수월성에 초점을 맞춰 자사고와 특목고 체제를 지지한다. 지난 2014~2015년 박근혜 정부에서 이뤄진 1기 자사고 재지정 평가 당시에도 진보교육감들이 나서 자사고 지정 취소를 추진했으나 교육부는 모든 자사고를 존치시켰다. 당시 진보교육감들은 교육부 장관을 상대로 소송까지 제기했지만, 수년간 진행된 소송 이후 남은 것은 교육부 장관의 동의를 얻어야 자사고 지정을 취소할 수 있도록 시행령이 개정된 것 뿐이다.
반면 진보진영에서는 창의성과 민주시민정신을 강조하는 평등성에 무게를 두고 자사고와 특목고 폐지를 외치고 있다. 대신 혁신학교를 대안으로 내세우고 있다. 대입 위주 교육 대신 자율성·창의성을 기르는 교육에 초점을 두는 혁신학교는 연 평균 4000만원의 재원을 지원받고 있다. 진보교육감 주도 아래 지난 10년간 양적으로 급증했지만 자사고와 달리 혁신학교에 대해선 학부모의 호불호가 극명하게 갈린다. 특히 중·고등학교의 경우 학력이 떨어지기 쉽다는 인식이 학부모들 사이에 뿌리 깊게 박혀 있어 기피현상까지 나타나고 있다.
이런 상황 등을 감안해 교육부는 이번 2기 자사고 재지정 기준점수를 60점에서 70점으로 상향조정해 문턱을 높였다. 1기 때 기준이었다면 통과하고도 남았을 자사고가 존폐위기에 직면한 것도 이 때문이다.
문재인 정부는 이렇듯 단계적으로 자사고 폐지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이 정부 초대 교육부 장관인 김상곤 전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은 "고교 서열화 문제를 야기하는 고교체제를 개선해 경쟁 중심의 교육 패러다임을 변경하겠다"고 했었다.
그러면서 "엄정한 성과평가와 행정적·재정적 지원을 통해 일반고로의 단계적 전환을 유도하는 동시에, 충분한 의견수렴과 사회적 합의를 거쳐 고교체제 개편 방안을 마련해 나가겠다"고도 밝혔다.
하지만 김 전 부총리의 말과는 달리 문재인 정부에서 자사고 폐지 문제를 놓고 충분한 의견수렴이나 사회적 합의는 이뤄지지 않았다.
전문가들은 이제라도 단순히 자사고를 폐지할 게 아니라, 중·장기적으로 대입제도와 고교 서열화 문제를 해결할 근본적인 방안을 찾아야 한다고 지적한다. 현 상황에선 자사고를 폐지하더라도 대입 위주의 소위 '명문고'를 선호하는 현상이 사라지기 어렵다는 판단에서다.
충청지역 한 국립대 교수는 "자사고를 대체할만한 일반고 모델이 자리잡기 위해서는 굉장히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며 "장기적으로 대학서열화를 완화하고 성과와 평판으로 인정받아야만 혼란을 최소화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일각에서는 국가교육위원회처럼 교육백년대계를 유지할 독립기구가 마련돼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교육부는 올해 하반기에 10년 이상 중·장기 교육정책을 이끌어 갈 대통령 직속 합의제기구인 국가교육위원회 설립을 추진할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하지만 설립을 위한 법안이 현재 국회에 계류돼 있어 6월 임시국회에서 해당 법안이 통과되지 못하면 국가교육위원회 설립 시기는 내년으로 미뤄질 수 밖에 없다.
교육부 한 간부는 "정권에 따라 교육정책의 일관성이 떨어진다면 결국 피해는 학생들이 보게 된다"면서 "가능한 빠르게 중·장기 교육정책을 심의할 수 있는 국가교육위원회가 속히 설립돼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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