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는 이주열 "성장 지키면서 물가 잡을 수 있는 묘책 필요"

통화정책은 상대를 내 편으로 만드는 '협조게임'

"이창용, 빼어난 인품과 뛰어난 식견 갖춘 분"

[서울=뉴시스]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가 23일 서울 중구 한국은행에서 열린 송별 기자간담회에서 발언을 하고 있다. (사진=한국은행 제공) 2022.03.23. [email protected]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뉴시스] 류난영 기자 =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는 31일 "성장을 지키면서도 금융안정과 함께 물가를 잡을 수 있는 묘책이 요구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이 총재는 이날 서울 중구 부영태평빌딩에서 열린 이임식에서 "가계부채 누증 등 금융불균형이 심화되고 금융위기 이후 사라져 버린 줄 알았던 인플레이션이 다시 나타나면서 경제의 안정적 성장을 위한 바람직한 정책체계가 무엇인지에 대해 또다시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며 이 같이 밝혔다.

그는 " 지금 우리 사회는 디지털화의 가속으로 돌이킬 수 없는 변화를 겪고 있는데 어떤 모양으로 나타날지 아직 알 수 없는 뉴노멀에의 적응은 중앙은행도 피할 수 없는 도전 과제"라며 "자못 경제라는 것은 어떤 공식에 의해 정교하게 맞물려 기계적으로 움직이는 시스템이라기보다 사회의 구조 변화와 기술발전에 따라 지속적으로 진화하는 일종의 생태환경"이라고 말했다.
 
지난 8년 간의 통화정책에 대해서는 "지난 8년간의 제 임기중 대부분은 기존의 경험이나 지식과는 많이 다른, 매우 익숙치 않은 새로운 거시경제 환경에서 통화정책을 운용하지 않았나 싶다"며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완화적인 통화정책이 장기간 이어졌음에도 세계경제가 저성장·저물가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했던 상황은 경제학 교과서를 새로 써야 한다는 말이 나오게 하기에 충분했고, 좀처럼 풀리지 않은 이러한 수수께끼는 코로나 사태를 겪으면서 더 복잡해지고 난해한 고차방정식이 됐다"고 회고했다.

그러면서 "세월호 사고, 메르스 사태, 브렉시트, 미·중 무역갈등과 세계화의 후퇴, 코로나 바이러스에 의한 세계 보건위기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까지 그야말로 격랑의 소용돌이를 지나왔다"며 "개별 사건의 충격이 어떻게, 어느 정도로 파급될지 예상하기도 어렵거니와 일련의 사건들이 서로 상승작용을 해 경제 전체를 어느 방향으로 끌고 갈지 가늠조차 쉽지 않다"고 지적했다.

이 총재는 "중앙은행의 유일한 존립기반은 국민으로부터의 신뢰를 얻는 것으로, 국민의 신뢰는 일관성 있고 예측가능한 정책 운용을 통해 비로소 얻을 수 있다"며 "통화정책은 포커 게임처럼 내 패를 감춰야 하는 비협조 게임이 아니라 패를 보여주고 상대를 내 편으로 만들어야 하는 협조게임이다. 정책결정의 적기를 놓치지 않으면서도 시장참가자와의 인식의 간극을 줄여나가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고 말했다.

최근 통화정책 운용에 고용안정을 추가해야 한다는 논의가 나오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앞으로 여러 가지 사회문제 해결에 경제적 처방을 동원하고자 하면 할수록 중앙은행에 대한 기대와 의존은 계속 늘어나게 될 것"이라며 "경제구조나 제반 환경에 근본적인 변화가 있게 되면 중앙은행 역할에도 변화가 불가피할 수 있다. 중앙은행으로서의 본연의 정체성을 지키면서 앞으로의 역할을 어떻게 정립해 나갈 것인지 깊이 있는 연구와 논의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말했다.

이창용 한은 총재 후보자에 대해서는 "다음 총재로 지명되신 분은 빼어난 인품과 뛰어난 식견을 갖춘 훌륭하기 이를 데 없는 분이라 생각한다"며 "새 총재님의 풍부한 경륜이 여러분들의 열정과 결합돼 한국은행이 더욱 발전해 나가는 모습을 보게 되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지난 43년간의 소회에 대해서는 "되돌아보면 지난 8년은 저 나름대로 한국은행이라는 큰 나무를 더욱 굳건히 하고자 한 시간이었다"며 "오랜 기간 준비해 온 시험을 끝내고 난 후의 후련함도 있지만 답안지를 다시 복기해보니 어김없이 찾아오는 아쉬움, 즉 '좀 더 잘 볼 수 있었는데' 하는 미련을 떨칠 수가 없다"고 회상했다.

그는 "성과도 분명 적지 않았지만 직원들이 체감할 수 있을 정도의 변화를 이끌어 내기에는 미흡했던 것으로 생각한다"며 "우리 직원들이 약 2년간의 노력 끝에 조직·인사 혁신방안의 밑그림을 그렸는데, 앞으로 어떻게 실행해 나갈 것인가는 이제 새 총재의 몫으로 한국은행이 탁월하고 건강한 조직으로 한걸음 한걸음 꾸준하게 나아가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이 총재는 이날을 끝으로 지난 8년 간 재임했던 한은 총재직에서 물러났다.  이 총재는 원주 대성고와 연세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1977년 한은에 입행한 뒤 조사국장, 정책기획국장, 통화정책담당 부총재보, 부총재 등 주요 보직을 두루 거쳤다. 2014년 박근혜 정부에서 총재로 임명된 후 4년 뒤 2018년 문재인 정권에서 연임에 성공했다. 하나금융경영연구소 고문, 연세대 경제대학원 특임교수로 재직한 2년을 제외하고 무려 43년을 한은에 몸담는 등 '최장수 한은 근무' 타이틀도 가졌다.
 
이 총재는 지난 8년 간 금융통화위원회(금통위) 의장으로 통화정책방향 결정회의만 총 76회 주재했다. 지난 8년간 금통위는 기준금리를 9차례 인하, 5번 인상했다. 2014년 4월 1일 연 2.5%였던 기준금리는 현재 연 1.25% 수준이다. 이 총재는 메르스 사태, 브렉시트, 코로나 위기 등의 국면에서 기준금리를 내려 경제를 방어했다. 그러나 코로나19 위기 이후 사상 유례 없이 낮아진 기준금리에 가계 부채가 사상 최고 수준으로 늘고, 부동산 가격 상승을 부추겼다는 비판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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