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페이스북
  • 트위터
  • 유튜브

"3·15의거 참여 고교생들, 무법천지의 시대 분노했다"

등록 2024.10.23 12:00:00수정 2024.10.23 15:48:16

  • 이메일 보내기
  • 프린터
  • PDF

진실화해위 '시위 참여 10명 확인 사건' 진실 규명 결정

"시내 정전 되자 경찰이 직사" 총격 상황 진술 등 이어져

"3·15의거 참여 고교생들, 무법천지의 시대 분노했다"


[창원=뉴시스]홍정명 기자 =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이하 진실화해위원회)는 지난 22일 서울 중구 진실화해위원회에서 열린 제89차 회의를 열고, '3·15의거 시위 참여 확인 사건(김모 등 10명)'에 대해 진실규명 결정을 하고 국가와 지방자치단체 등에 후속조치를 권고했다고 23일 밝혔다.

3·15의거는 1960년 자유당 정권의 3·15 부정선거와 권위주의적 통치에 반발해 마산 지역을 중심으로 일어난 최초의 유혈 민주화운동이다.

당시 경찰 등 공권력의 무차별 총격과 시위 참여자에 대한 폭행과 구금, 고문 등으로 다수의 사상자와 인권침해가 발생했다.

접수된 사건을 조사한 결과, 신청인 김모 씨 등 10명은 3·15의거 당시 마산고등학교 학생으로 1960년 3월 15일 부정선거 규탄 시위와 1960년 4월 11일 고(故) 김주열 열사 시신 발견 이후 일어난 시위에 개별적으로 참여하거나 학생 단체 시위에 참여한 것으로 확인됐다.

진실화해위원회는 신청인들이 진술 조사 과정에 시위 참여 사실에 대해 구체적이고 일관된 진술을 했고, 참고인 진술에서 신청인의 시위 참여 사실을 확인했다고 설명했다.

또, 신청인들의 진술이 3·15의거와 관련한 각종 사료 및 언론보도 등과 부합한 점 등을 통해 시위에 참여한 것으로 최종 판단했다.

신청인들은 1960년 3월 15일 이전부터 부정선거 움직임이 있었다는 사실을 진술했다.

신청인 조모 씨는 “(부정선거를) 알고 있었지만 어찌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자유당은 국민을 사람 취급 안 했습니다. 소위 말하면 무법천지였습니다"라고 했으며, 박모 씨는 "1959년 10월부터 면 단위, 리 단위 조직들이 이승만과 이기붕을 찍어야 한다고 협박하는 분위기였습니다"라고 전했다.

신청인 정모 씨는 "학교 선생님이 수업에 들어와서도 '(정권을) 갈아본들 뭣 하느냐' 하는 식으로 말씀하셔서 학생으로서 분노했습니다"라고 진술했으며, 허모 씨와 정모 씨도 "(마산고 교사들이 학생 시위 저지를 위해 교문을 막자) 학생들은 분개해서 담을 뛰어 넘었다"고 진술했다.

1960년 3월 15일 저녁 북마산파출소 경찰 발포 상황에 대한 구체적인 진술도 이어졌다.

신청인 박모 씨는 "시내가 정전이 되니까 (경찰이) 직사로 총을 쏘는 겁니다. 제 바로 앞에 1~2m 떨어진 한 사람이 '욱' 하면서 쓰러지는 겁니다"라고 전했다.

신청인 감모 씨는 "점차 어두워지니 시위대가 투석하기에 좋은 조건이었습니다. (경찰 총격에) 시위 군중 몇 사람이 쓰러졌는데, 그 중에는 친구 김모씨 동생도 있었고, 마산상고 출신 강모 씨도 있었습니다"라고 증언했다.

허모 씨도 "(북마산파출소 화재 발생 전) 총소리가 났습니다. 누군가 총에 맞아서 쓰러지는 걸 보고 항거하다가 겁을 먹고 집으로 갔습니다"라고 진술했다.

이 외 신청인과 참고인들은 마산시청과 부근 전도관·무학국민학교, 오동동·남성동 등 마산 시내 각지에서 당시 경찰 총격에 대해 구체적으로 진술했다.

진실화해위원회는 이번 진실규명 결정을 통해 국가와 지방자치단체, 경상남도교육청에 3·15의거 참여자의 명예를 선양하고, 3·15의거 정신과 역사적 의미를 후대에 알리기 위한 교육사업 및 기념사업, 관련 법령 제·개정 등을 권고했다.
 
진실화해위원회는 그동안 3·15의거 사건 관련 402명에 대해 진실규명 결정을 했으며, 이번 10명의 진실규명을 포함해 진실 규명자는 총 412명으로 늘어났다.


◎공감언론 뉴시스 [email protected]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