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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꼬마 상주 등 헌정유린 맞선 20명 정신적 손배 승소

등록 2023.05.29 06:00:00수정 2023.05.29 06:2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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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사천·박금희 열사 유족, 정춘식·전계량 전 5·18유족회장 등 참여

法 "국가 기관에 의해 자행된 반인권적 행위로 위법성 매우 중대"

**저작권자 요청으로 회원사는 사용할 수 없습니다** 2019.05.18 (제공=정태원씨)

**저작권자 요청으로 회원사는 사용할 수 없습니다** 2019.05.18 (제공=정태원씨)


[광주=뉴시스] 신대희 기자 = 5·18민주화운동 당시 전두환 신군부의 헌정 유린에 맞서 민주주의를 지킨 시민들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소송에서 승소했다.

광주지법 제14민사부(재판장 나경 부장판사)는 5·18 국가폭력 피해자 20명(상속인 포함)이 "정신적 손해를 배상하라"며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에서 원고 일부 승소 판결을 했다고 29일 밝혔다.

재판부는 원고들이 청구한 금액의 41.3~89.3%를 인정했다. 원고들은 판결이 최종 확정되면 최소 810만 원에서 최대 1억 원에 달하는 정신적 피해 배상금(위자료)을 받게 된다.

이번 소송에는 정춘식·전계량 전 5·18유족회장과 가족, 차종수 5·18기념재단 기록진실부장과 가족, 조사천·박금희 열사의 유족 등이 함께했다.
 
정춘식 전 5·18유족회장의 동생인 정윤식 열사는 1980년 5월 27일까지 최후 항쟁에 참여했다가 상무대로 연행됐다. 102일간 고문당한 후유증으로 23살인 1982년 2월 28일 숨졌다.

정 전 회장도 항쟁 도중 차에서 떨어져 장해 12등급 판정을 받았다.

전계량 전 5·18유족회장의 아들인 전영진 열사도 고교 3학년 때 휴교령이 내려지자 참고서를 사러 가던 중 계엄군에게 붙들려 폭행당했다.

그는 군의 행동이 잘못됐다는 것을 깨닫고 1980년 5월 21일 전남도청 앞 항쟁에 참여했다가 조준 사격에 머리를 맞아 숨졌다. 그가 집을 나서기 이틀 전 어머니에게 "엄마, 조국이 나를 불러요"라고 말한 일화는 유명하다.

차종수 5·18재단 부장의 형인 차종성 열사도 1980년 5월 19일 무등경기장 주변에서 계엄군에게 마구 구타당한 뒤 광주교도소에 수감됐다. 모진 고문 끝에 석방됐으나 후유증으로 3년 뒤 숨졌다.

1980년 34세였던 조사천 열사는 전세계에 5·18 아픔을 전한 '꼬마 상주' 사진의 영정 주인공이다.

조 열사는 같은 해 5월 20일 광주교대 주변에서 공수부대원들의 만행을 보고 항쟁에 참여했다. 이튿 날 전남도청 앞에서 계엄군이 쏜 총을 맞고 숨졌다.

조 열사가 3대 독자였던 탓에 다섯 살 난 아들 천호군이 상주를 맡았다. 아버지의 영정 위에 턱을 괸 사진이 외신에 보도되면서 5·18을 상징하는 사진 중 하나가 됐다.

박금희 열사도 고3 때인 1980년 5월 21일 투쟁하는 시민들을 위해 헌혈한 뒤 귀가하던 중 계엄군 총탄에 희생됐다.

재판부는 원고들이 신군부의 헌정 질서 파괴 범죄에 대항한 정당행위를 했는데도 불법 체포·구금·고문을 당해 정신적 고통을 받은 것이 인정된다고 판시했다.

재판부는 국가기관에 의해 자행된 반인권적 행위라는 이 사건 불법 행위의 중대성, 인권 침해 행위 재발 방지 필요성, 피해자와 유족의 고통, 43년간 배상이 지연된 점 등을 두루 고려해 각각 위자료를 정했다고 설명했다.
 
1980년 5월21일 광주 금남로에서 계엄군 총에 맞아 숨진 조사천(당시 34세) 열사의 영정을 아들 조천호씨(당시 5세)가 들고 있는 모습. 2019.05.18. (사진=5·18기념재단 제공) photo@newsis.com

1980년 5월21일 광주 금남로에서 계엄군 총에 맞아 숨진 조사천(당시 34세) 열사의 영정을 아들 조천호씨(당시 5세)가 들고 있는 모습. 2019.05.18. (사진=5·18기념재단 제공) [email protected]




◎공감언론 뉴시스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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