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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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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백년과 여성]③'신채호 부인' 박자혜…고단했던 독립운동 뒷바라지

중국 연경대 의예과 재학 시절 신채호 만나
신채호 "독립운동으로 가정에 등한할 것"
홀로 귀국해 산파소 운영했지만 궁핍한 삶
신채호 사망에 "모든 희망 끊어졌다" 한탄

등록 2019.02.20 06:00:00수정 2019.02.25 09:3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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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박자혜(왼쪽)와 신채호의 모습.(사진=국가보훈처 제공)

【서울=뉴시스】박자혜(왼쪽)와 신채호의 모습.(사진=국가보훈처 제공)

【서울=뉴시스】김온유 기자 = 독립운동가 박자혜는 단재 신채호 선생의 부인으로도 잘 알려져있다.

박자혜가 신채호를 만난 것은 3·1운동 이후 조선총독부 의원 간호사를 그만두고, 중국 북경 망명길에 오른 뒤였다. 1919년 늦은 봄 연경대학교 의예과에 입학한 그녀는 이듬해 신채호를 만나게 됐다.

 후에 그녀는 이렇게 기록했다.

"검푸르던 북경의 하늘빛도 나날이 옅어져가고 만화방초가 음산한 북국의 산과 들을 장식해주는 봄 4월이었습니다. 나는 연경대학에 재학 중이고 당신은 무슨일로 상해에서 북경으로 오셨는지 모르나 어쨌든 나와 당신은 한평생을 같이 하자는 약속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신채호와의 결혼 생활은 2년 남짓. 독립운동에 몸을 바친 신채호와의 결혼 생활은 결코 순탄할 수 없었다. 신채호는 결혼과 함께 "가정에 등한할 수밖에 없음"을 당부하기도 했다.

1921년 신채호와 박자혜는 첫 아들 수범을 얻었다. 1922년 박자혜가 둘째 아들 두범을 임신하자 신채호는 그녀를 국내로 보냈다. 독립운동만 해오던 신채호로서는 가정의 경제적인 부분을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신채호는 1923년 김원봉과 만나 의열단 활동에 뛰어들었다. 일제 고위 관료와 친일파 암살, 일제 통치기구 파괴 등을 통해 독립을 쟁취하고자 했던 의열단으로서의 삶은 더욱 위험하고 안정적이지 못했다.

박자혜는 홀로 국내에서 산파소를 시작했지만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이미 일제에 낙인이 찍혀 서슬퍼런 감시가 이어졌고 손님이 산파소를 찾는 일도 없었다.
【서울=뉴시스】박자혜의 산파소를 다룬 당시 기사(사진=국가보훈처 제공)

【서울=뉴시스】박자혜의 산파소를 다룬 당시 기사(사진=국가보훈처 제공)

당시 언론은 "열 달이 가야 한 사람의 손님도 찾아오지 않아 산파소 간판을 달아 놓은 것이 도리어 남에게 부끄러울 지경이다. 그러니 아궁이에 불 때는 날이 한 달이면 사오일이라"라고 열악한 상황을 알렸다.

또 "산파소 간판이 걸린 초가집 대문을 넘어 중문턱에 들어서자 부엌도 마루도 없는 한칸 방에 박자혜가 앉아있었다. 부인의 얼굴을 차마 바라보기 어려웠다"고도 썼다.

박자혜는 국내에서 궁핍한 생활을 이어가면서도 대한민국의 독립을 도왔다. 그녀는 신채호와 연락하며 의열단 활동을 접했고 국내로 들어온 독립 운동가들을 더욱 잘 도울 수 있었다.

대표적인 사례가 나석주 폭탄 사건이다. 1926년 12월 나석주는 조선은행과 동양척식회사에 폭탄을 던졌다. 서울행이 처음인 나석주는 사전 조사 등에 박자혜로부터 도움을 받아 거사를 치른 것으로 알려졌다.

1928년에는 신채호가 일경에 체포됐다. 박자혜는 중국 대련 감옥에 있는 신채호에 하소연을 하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신채호는 이에 "정 할 수 없으면 고아원에 아이들을 보내라"고 답했다.

그러나 그녀는 풀장사와 참외장사도 마다하지 않으며 첫째 아들을 한성상업학교까지 졸업시켰다. 2살배기 딸은 영양실조로 품에서 떠나보내야 했다. 일경들은 아들 수범이 학교에 가기 위해 집을 나서면 책가방을 뒤지는 등 감시와 폭력을 이어갔지만 박자혜는 굴하지 않았다.

1936년 2월. 그런 그녀에게 '신채호 뇌일혈로서 의식 불명. 생명 위독'이라는 비보가 들이닥쳤다. 그녀는 곧장 여순으로 갔지만 신채호를 안았을 때는 이미 의식이 없었다고 한다. 박자혜는 "이제는 모든 희망이 아주 끊어지고 말았다"고 말했다.
【서울=뉴시스】남편 신채호의 유골함을 안고 나오는 박자혜의 모습(사진=동아일보 제공)

【서울=뉴시스】남편 신채호의 유골함을 안고 나오는 박자혜의 모습(사진=동아일보 제공)

그녀는 또 이렇게 기록했다. "당신은 뜻을 못이루고는 영원히 돌아오지 않는다고 하시더니 당신의 원통한 고혼은 지금 이국의 광야에서 무엇을 부르짖으며 헤매나이까. 당신의 괴로움과 분함과 설움과 원한을 담은 육체는 작은 성냥 한개로 재로 변하고 말았다. 가신 영혼이나마 부디 평안히 잠드소서"

박자혜는 신채호의 시신과 함께 귀국했다. 신채호가 작고한 후 첫째 아들 수범은 학교를 졸업해 해외로 떠났다.

둘째 아들인 두범은 1942년 사망했다. 이후 홀로 셋방에 살던 박자혜는 1943년 49살의 나이에 병으로 조용히 숨을 거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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