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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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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백년과 여성]④"박자혜, 독립운동 보급기지 역할" 건국훈장 추서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받아
2009년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
"독립운동 도운 여성 역할 조명해야"

등록 2019.02.20 06: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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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박자혜의 모습(사진=국가보훈처 제공)

【서울=뉴시스】박자혜의 모습(사진=국가보훈처 제공)

【서울=뉴시스】김온유 기자 = 독립운동가 박자혜는 단재 신채호 선생의 부인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그러던 그녀가 독립운동가로 거듭난 것은 정부가 누군가의 부인이 아닌 '박자혜'의 인생을 바라보면서다.

정부는 독립운동가이자 독립운동가의 아내로서 인생을 바쳐온 박자혜의 공훈을 기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또 2009년에는 국가보훈처가 3·1운동 당시 박자혜가 '간우회' 회원을 모아 독립만세를 주도하고, 국내외에서 독립운동에 기여한 공을 높이 사 그녀를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박자혜는 1895년 12월11일 경기도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중인 출신의 박원순이고 모친에 대해서는 알려져 있지 않다. 어린 시기에 아기 나인으로 입궁해 약 10여년 궁 생활을 하다가 1910년 경술국치 이후 궁녀 신분을 벗어나 숙명여고 기예과에 입학해 근대 교육을 받았다. 졸업 후에는 사립 조산부 양성소를 다녔고 이후 조선총독부의원 산부인과 간호사로 취업했다.

1919년 3월1일 일어난 만세운동은 그녀의 인생을 바꿔놓았다. 대한독립을 외치다 일본군에 무자비한 진압을 당한 조선인들은 그녀가 일하던 병원에도 밀려들어왔다. 그들을 치료하던 박자혜는 조선인으로서 일본을 위해 일한다는 사실에 큰 부끄러움을 느끼고 독립운동을 결심했다.

박자혜는 간호사들을 모아 독립운동단체인 '간우회'를 만들었고, 다른 의료인들에게도 일제에 항거해야 하는 긍지를 전달했다. 그녀는 간호사들과 동맹파업을 준비하던 중 일본 경찰에 붙잡혔으나 풀려난 후 중국으로 망명했다.

 중국 북경에서 연경대 의예과에 입학한 박자혜는 1920년 신채호를 남편으로 맞이했다.

신채호와 박자혜 부부는 경제적인 어려움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고, 결국 박자혜는 1922년 고국으로 돌아왔다. 두 아들을 둔 어머니였던 박자혜는 생계를 위해 산파소를 열었지만 일본의 감시 등으로 경영난을 겪어야만 했다.
【서울=뉴시스】동양척식주식회사 건물 모습(사진=국가보훈처 제공)

【서울=뉴시스】동양척식주식회사 건물 모습(사진=국가보훈처 제공)

그럼에도 박자혜는 신채호와 연락을 주고 받으며 독립운동가들의 국내 임무를 지원했다. 1926년에는 서울의 지리를 잘 알지 못하던 나석주를 도와 그의 동양척식주식회사 폭파 의거가 성공하는 데 힘을 보탰다.

1929년 신채호가 체포된 후에도 박자혜는 독립의 희망을 저버리지 않았다. 그러나 신채호는 1936년 싸늘한 주검이 되어 고국으로 돌아왔고, 박자혜는 "이제 모든 희망이 끊어져버렸다"고 한탄했다.

신채호가 떠난지 7년째인 1943년 그녀 역시 셋방에서 홀로 숨을 거뒀다.

박자혜가 세상을 떠난 지 47년 국가는 그녀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고, 꼭 10년이 더 지난 2009년 그녀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대한민국 역사에 족적을 남기게 됐다.

윤정란 숭실대 사학과 강사는 논문 '일제강점기 박자혜의 독립운동과 독립운동가 아내로서의 삶'을 통해 "독립운동을 장기적으로 할 수 있었던 것은 여성들이 후방에서 보급 기지와 같은 역할을 해줬기 때문"이라며 "독립운동을 했던 남성들의 뒤에서 이를 지지해주고 오랜 기간 지원해준 여성들의 역할에 대해 제대로된 조명이 필요하다"고 제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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