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중심' 손병희 선생, 3월 독립운동가 선정
민족대표 33인 대표로 태화관서 독립선언서 발표
전국·해외 각지 3·1만세운동 확산 계기 도화선
【서울=뉴시스】 2019년 3월의 독립운동가 손병희 선생. (보훈처 제공)
【서울=뉴시스】 오종택 기자 = 국가보훈처는 광복회, 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손병희(1861.4.8.~1922.5.19.) 선생을 3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고 28일 밝혔다.
선생은 1894년 호서지방 중심의 북접(北接) 사령관인 통령(統領)에 임명돼 남접의 전봉준과 함께 동학농민혁명의 기수로서 활약했다.
1905년 동학을 천도교로 개칭하고 국권을 수호하고, 회복하기 위해 민족을 계몽하는 운동에 관심을 기울였다. 선생은 보성학교와 동덕여학교를 비롯한 수십 개의 남녀학교를 인수 또는 신설해 운영함으로서 민족의 동량(인재)을 육성했다.
선생은 1919년 1월 동경유학생의 2·8독립선언계획, 신한청년당 및 기독교계의 독립운동 계획을 듣고 독립선언 방식의 운동을 벌이기로 결정했다. 독립선언서를 발표하고 시위를 펼쳐 독립에 대한 열망을 알렸다. 일본 정부와 귀족원·중의원, 조선총독부 파리강화회의의 열국의 대표에게 한국의 독립에 대한 의견서와 청원서를 보내기로 했다.
1919년 2월27일 민족대표가 독립선언서에 날인했고 하루 뒤 선생의 집에 천도교, 기독교, 불교의 민족대표를 불러 협의해 독립선언서 발표 장소를 탑골공원에서 태화관으로 변경했다.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서를 발표하거나 배포하면 소동이 일어날까 우려한 것이다.
거사일인 3월1일 선생은 태화관에 모인 28인과 함께 독립선언식을 거행했다. 선언식을 마친 후 일경에 연락해 자진 체포됐다. 선생과 다른 민족대표가 점화한 3·1운동은 이후 요원의 불길처럼 국내 전역으로 확산됐다. 중국, 러시아, 미국 등 한국인이 살고 있는 세계 곳곳으로 퍼져나갔다.
선생은 1920년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언도받았고, 서대문형무소에서 2년간 옥고를 치르다가 뇌출혈로 가출옥했으나 1922년 5월19일 생을 마감했다.
선생의 유해는 서울 우이동 언덕에 안장됐다. 1966년 민족의 얼이 깃든 탑골공원에 선생의 동상이 세워져 독립된 국가의 앞길을 지켜보고 있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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