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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생각]'재분배의 역설'의 역설

등록 2019.11.08 13: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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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이채정 국회미래연구원 부연구위원

【서울=뉴시스】이채정 국회미래연구원 부연구위원

【서울=뉴시스】김경원 기자 = 얼마 전 차일피일 미루다 가볍게 감기를 앓고서야 옷장 정리를 마쳤다. 게으름의 대가로 여름과 가을, 겨울 옷가지를 모두 꺼내놓고 정신없이 반나절을 보냈다. 세상일도 계절을 탄다. 세상일의 계절에 둔감하고 게으르면 대가를 톡톡히 치러야 한다. 당장 눈에 보이지는 않아도 수많은 사람의 삶이 걸려 있는 문제라 둔감함과 게으름의 대가를 어떻게 치러야 할지 가늠조차 할 수 없다.

빈곤층에게 집중적으로 복지정책을 제공하는 것(선별주의)과 사회구성원 대다수에게 복지정책을 제공하는 것(보편주의), 어느 쪽이 재분배에 더 효과적일까? 빈곤층에게 필요한 급여와 서비스를 제공하면 상대적으로 적은 비용을 투입하여 재분배 효과를 거둘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복지정책의 관대성(선별주의 vs 보편주의)을 논의할 때면, 빠지지 않고 '재분배의 역설'(paradox of redistribution)이 등장한다.

스웨덴의 사회학자인 코르피와 팔메(Korpi & Palme, 1998)는 저소득층에게 집중된 복지정책(선별주의)이 오히려 정책개입을 통한 빈곤완화효과를 감소시킨다는 재분배의 역설을 주장하였다. 이들은 1980년대 중반 유럽 11개국의 노인복지정책 자료로 복지지출의 관대성 수준에 따른 소득불평등지표(지니계수)의 변화를 분석한 결과를 토대로 선별주의가 강할수록 특정 계층에게 복지혜택이 집중되어 일반 국민의 복지정책 지지도가 낮아지고, 결국 재분배정책에 투입되는 재원이 감소하게 된다는 견해를 제시하였다.

그러나 2000년대 유럽 자료를 활용한 국내외 연구에서는 재분배의 역설이 성립하지 않는다는 결과가 보고되고 있다. 2008년부터 2015년까지 유럽 31개국을 대상으로 수집된 유럽연합통계국(Eurostat) 자료를 바탕으로 복지지출의 관대성이 재분배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하여 보았다. 분석 결과, 빈곤층에게 집중적으로 복지정책이 제공되면 빈부격차(지니계수)와 빈곤층 규모(빈곤율) 모두 감소하는 경향이 확인되었다. 취약계층을 중심으로 복지지출을 늘리는 선별주의 전략이 효과적인 재분배를 가능케 하는 것이다. 요컨대 '재분배의 역설'의 "역설"이다.

지난 20여 년 동안 무슨 일이 있었기에 재분배의 역설이 뒤집힌 것일까? 통계적 유의성은 확보되지 않았으나 흥미로운 부분이 눈에 띄었다. 1인당 국내총생산(GDP)의 증가가 재분배에는 긍정적이지만 빈곤층 규모의 감소에는 부정적인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경제성장의 과실이 빈곤층에게는 돌아가지 않고 빈곤층을 제외한 계층 내부에서 분배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결과일 수 있다.

즉 빈곤층은 '빈곤의 덫'(poverty trap)에서 벗어나기 어렵고 주로 빈곤층을 제외한 집단 안에서 자원 배분이 발생하는, 전체 인구를 대상으로 하는 재분배 기능이 정체된 상황일 가능성이 크다. 이런 상태에서는 보편주의적 복지지출보다는 선별주의적 복지지출을 통하여 빈곤을 해소하는 것이 효과적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재분배의 역설의 역설이 발생하고 있을까? 아쉽게도 한국의 복지지출 관대성 수준에 따른 재분배의 효과성 추이를 분석한 실증연구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그러나 합리적 의심을 거둘 수 없는 정황 증거가 포착됐다. 어쩌면 우리나라가 가난한 사람들은 가난한 채로 머물러 있고, 살만한 사람들 사이에서만 재분배가 이루어지는 균열된 사회에 다다른 것일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엄습한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빈곤통계연보'에 따르면 2010년부터 2016년까지 상대적 빈곤율(가처분소득 기준 중위 50% 미만 인구 비중)은 13~14%대를 유지하고 있다. 빈곤층 규모에 변동이 발생하지 않은 것이다.

한편 2010년 이후 복지지출 규모는 보편주의적 사회정책을 중심으로 확대되었다. 2013년 0~5세 영유아를 대상으로 무상보육을 시행하였고 2014년 노인 소득하위 70%를 대상으로 하는 기초노령연금을 기초연금으로 전환한 뒤 지속해서 기초연금액을 인상하고 있으며 2018년 0~6세 영유아를 대상으로 도입한 아동수당을 2019년에는 0~7세로 확대하였다. 그러나 경제성장률이 전년대비 하락한 2018년 2/4분기 기준 상대적 빈곤율은 15.7%로 집계되었다. 보편주의적 복지지출의 확대가 빈곤층 규모의 감소로 이어지지 못하는 것이다.

왜 가난한 사람들을 두고 살만한 사람들에게 혜택을 주는 사회정책을 펼치고 있냐고 힐난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나라는 일반 국민을 대상으로 하는 보편주의적 복지지출 비중이 적어 복지체감도가 낮은 국가인 것도 사실이다. 그러니 사회수당 형태의 복지지출을 확대하여 전반적인 복지체감도를 높일 필요가 있었다. 다만 재분배의 역설의 역설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다가오는 변화에 대응하자고 말하고 싶다.

사회정책도 경제정책과 함께 경기변동에 대응한다. 사회정책과 경제정책은 자주 다투는 이란성 쌍둥이지만 위기에는 유연하게 함께 맞서왔다. 이들에게 불변의 진리는 없다. 상황에 맞추어 늘리기도 줄이기도 상대적으로 강자인 쪽에 서기도 약자인 쪽에 서기도 하면서 당면과제를 풀어낸다. 한동안 재분배의 역설에 근거하여 정책을 펼쳐왔다면 이제는 저성장과 재분배의 역설의 역설에 대응할 차례이다. 그리고 언젠가는 다시 재분배의 역설에 근거한 정책을 확대해야 할 시점이 올 것이라고 믿는다.

우리나라의 2019년 경제성장률이 1%대를 기록할지도 모른다는 어두운 뉴스가 낙엽 지는 계절을 더욱 쓸쓸하게 만든다. 빈곤층을 포용하는 재분배 기능이 정체되고, 그나마도 사회구성원이 나눌 자원의 총량이 감소하는 추운 계절을 마주하고 있는 셈이다. 영하의 날씨에 시리다 못해 아린 손을 푹 찔러 넣을 주머니 있는 두꺼운 옷을 미리 꺼내두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리하여 혹독한 계절을 모두 함께 무사히 보내고 봄날으로 가자.

이채정 국회미래연구원 부연구위원([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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